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루이 Nov 08. 2022

상실 수업

슬픔에 자리를 내어주라

<상실 수업>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권한다. 


-분노가 솟구치면 소리 내어 분노하라. 판단하지 말고, 의미조차 찾으려 하지 않고, 오직 분노 그대로를 느끼라. 어차피 삶은 불공평하다. 죽음 역시도 불공평하다. 그러니 이토록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상실 앞에서,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으랴.


불공평한 삶과 죽음, 그리고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상실을 마주하며 엉엉 울어버린다. 그녀의 제안대로 슬픔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한 남자아이를 떠올려봤다.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에 나온 아이다. 그 아이는 졸업식 공연에서 카혼을 치다가 눈물을 쏟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다가 입을 벌리고 목놓아 울었다. 정말이지 꺼이꺼이, 황당할 만큼의 오열이다. 작가는 ‘백 명 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슬픔을 온전히 누리던 그 아이’라고 적었는데 나는 그 장면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나의 슬픔을 온전히 누려본 적이 언제였던가? 어른이니까, 엄마이니까 슬퍼도 마음껏 슬퍼하지 못하는 사회적 자아. 퀴블러 로스는 또 이렇게 적었다. ‘후회할 만큼 후회하고, 미워할 만큼 자신을 미워하다가, 쓰러질 만큼 최대한 울라. 30분 동안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지 말라.’ 그러니 절대 20분 만에 그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바람’이다. 중국 최후의 수렵 소수 민족 어원커 사람들은 우울하고 답답하면 바람 속에 잠시 서 있다. 그러면 바람이 가슴에 쌓인 우울을 불어 흩날려준다. 생의 마지막도 바람과 함께 한다. 고인을 대부분 풍장(风葬)으로 기리기 때문이다. '네 그루의 곧고 커다란 나무를 골라 나무 막대를 나뭇가지 위에 가로로 놓고 사방을 평평하게 만든 다음 시신의 머리는 북 쪽으로 향하게 하고 다리는 남쪽으로 놓은 다음 나뭇가지로 덮는' 방식이다. 


14년에 걸쳐 '풍장'이라는 시를 지은 황동규 시인도 있다. '내 세상 뜨면 풍장 시켜 다오/.../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도 해탈도 없이/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바람과 놀게 해 다오' 


김영옥 선생님의 목소리로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듣는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나는 그곳에 없어요/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나는 천 개의 바람/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나이를 먹는다는 건 내 앞에 남은 끝없을 상실을 상상하고 받아들이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상실에 익숙해지는 편이 아무래도 낫겠지만 그것은 천 번을 반복한다고 해도 어려운 일이다. 아주 우연히 살아 남은 나는 천 개의 바람이 된 그대를 그리워한다. 

--

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과 어울리는 단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