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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Nov 17. 2022

성실한 사랑

사랑 중에 제일은 성실한 사랑이라

-언니, 언니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말이야. 운전할 줄 알고 책 좋아하는 여자는 전부 이혼했어, 내가 아는 범위 안이긴 하지만.


사노 요코,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289p


나는 이 문장을 읽자마자 아직 살아남았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혹시 운전하는 것을 싫어해서? 아니면 같이 사는 사람이 책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혼을 하기에는 같이 사는 사람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좋아해서? 역시 제일 마지막 이유일 것이다. 나는 지금 춘이 끓이는 얼큰한 멸치 김칫국 냄새를 맡고 있다.


나와 정반대 성향인 춘은 내가 좋아하는 에세이와 소설(그는 주로 IT나 경영 서적을 읽는다), 폴킴과 잔나비(그는 주로 탑 100을 듣는다), 인디 영화(블록버스터나 타짜, 신세계 류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좋아하지 않지만 늘 성실한 사랑을 보여준다. 시를 읽지 않지만 시집을 사서 선물하고(절대 펼치지는 않는다), 본인의 플레이리스트에는 찾아볼 수 없는 인디밴드의 콘서트 티켓을 위해 광클을 한다(그들의 명곡들은 알지 못한다). 15년 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낮 12시에서 12시 10분 사이 점심을 잘 챙겨 먹으라는 문자를 보낸다(가끔 어떤 프로그램을 쓰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안정적인 정서로 무장한 채 낮은 도와 높은 도를 오가는 '기복 인간'인 내게 한결같이 ‘미’를 치는 삶의 경지를 보여준다. 내 글을 유심히 읽지 않지만 내가 편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도록 긴 자유 시간을 준다(이 글도 아주 먼 훗날 읽게 될 것이다). 낯간지러운 말을 건네거나 멋진 이벤트를 준비하지는 않지만 로봇처럼 빨래를 돌리고 개킨다. (재택근무하는 날에는 늘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다)


한때 나의 감성을 이해해 줄 진정한 뮤즈를 찾아 떠나야 하나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전에 경험하지 못한 무색, 무취의 시간이 쌓이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종류의 사랑 중 제일은 성실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의 건강함, 체력, 성실함은 늘 탄복할 만 하고, 헌신 또한 그렇다. 십오 년 째 입만 나불대는 나와는 다른 그의 '행동파적 사랑'을 추앙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를 추앙하게 됐다. 


그러니 사랑의 필수조건으로 열정이나 설렘보다 더 앞 쪽의 항목에 성실함을 적어야 할 것이다. 아이에게도 성실한 사랑을 보여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아이에게 본인의 공간을 많이 주되 결코 놓아버리지는 않는 느슨한 성실을 실천하고 싶다.


그는 매일 한 장의 하늘 사진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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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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