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 가득 찬 작은방
병실에서 내가 엄마 몰래 한 일은 외할아버지를 생각한 것이다. 능숙하게 회를 뜨고, 미군에서 일한 경력으로 토마토 파스타를 맛있게 삶고 베레모가 잘 어울리던 외할아버지. 우리 아빠보다 더 젊은 감성이었지. 만날 때마다 나를 꼭 안아주셨는데 할아버지의 동그란 배가 밀어내듯 감싸는 그 느낌이 좋았다.
할아버지는 당뇨 합병증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파릇한 대학생 신입생 시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일할 때 부산 외가댁에서 잠시 지냈다. 지팡이를 짚고 해운대에서 막차를 타고 오던 손녀를 전철역 입구에서 기다리던 나의 할아버지, 우리 엄마의 아버지. 늦은 밤 우리는 팔짱을 끼고 세 발자국 걷다 서서 조금 쉬고, 또 세 발자국 걷다 서서 조금 쉬고 그랬더랬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산책. 나는 함께 가는 길 위에서 할아버지가 혼자 걷다 쉬다 했을 '오던 길'이 떠올라서 목이 콱 막혀버렸다. 후두두둑. 더러운 길바닥에 아무도 모르게 떨어트린 눈물방울방울. 보름달처럼 환한 기억.
아직도 동그란 배와 동그란 머리를 가진 노인을 만나면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어릴 때 받은 조건 없는 사랑의 길고 긴 생명력에 놀라면서. '세대와 세대를 건너서 손을 탄다는 것. 노인의 리듬으로 아이가 살아간다는 것...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몸이 아주 느리게 전두환 정권에 태어난 아이의 입을 순면으로 닦아준다.'*
조부모의 사랑은 남다르다. 무조건적인 사랑. 조부모는 손주가 성공하기보다는 편안하기를 바란다. 똑똑하기보다는 행복하기를 바란다.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의 심윤경 작가가 할머니에게 배운 사랑 또한 비슷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은 아이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할머니. 할머니가 작가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평화로 가득 찬 작은방'이었다.
내 마음 깊은 곳에도 그 방이 있다. 고해성사의 장소이자 때때로 산소호흡기.
방에 들어가 두 손을 모은다.
"할아버지, 엄마와 엄마 눈을 지켜주세요."
병실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덥게 느껴지던 오후, 오빠에게 메시지가 왔다. '어젯밤에 할아버지가 꿈에 나오셨는데 환하게 웃고 계시더라.' 오빠도 할아버지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던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며 짧은 낮잠을 잤다.
*고명재,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