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처음 엄마 머리를 감기며
심이가 태어났을 때 100일 동안 엄마는 우리 집 거실에서 살았다. 거실에 모녀 3대가 옹기종기 모여서 두 시간 이상 연속으로 잘 수 없는 희한하고도 극악무도한 세계를 맞이한 것이다. 계속 우는 아이는 축복이라기보다는 갑자기 찾아온 쓰나미 같았고, 모유 수유는 자연 분만 이상의 아픔을 선사했으며 엄마는 새벽 4시 새하얗고 비린 붕어즙을 데워 내게 건넸다. 나는 미각과 후각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불평 없이 붕어즙을 목구멍으로 들이부었다. 엄마는 100일 동안 미역국을 끓였다. 들통은 굴, 황태, 소고기 미역국이 돌아가면서 채워졌다.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비싼 보석을 손에 든 것처럼 조심하며 아이를 매일 씻겼다.
그것뿐일까. 베이징에서 첫 타국살이를 시작했을 때도 엄마는 우리와 함께 출국해 2주간 매일 청소기를 돌리고, 반찬을 만들었다. 이제 좀 안심이라는 표정으로 생전 처음 혼자 한국행 비행기를 타며 엄마는 내 마음이 약해질까 봐 울지도 않았다. 그렇게 강인했던 엄마에게 불면증이 찾아온 때는 타국에 사는 우리를 걱정하던 그 시간이었다.
3일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나는 몽롱한 상태로 자꾸 그 시절을 생각했다. 보호자의 위치가 조금 바뀌었지만 어차피 우리 사이에 흐르는 것은 비슷했으므로.
병실에는 매일 정확한 시간에 한 끼가 배달됐고, 나는 매번 샐러드를 사 와서 엄마와 함께 나눠 먹었다. 샐러드는 흡사 그때의 굴 미역국처럼 따뜻하게 느껴진다.
생전 처음으로 엄마 머리를 감기는 시간. 미용실 의자 같은 것이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없었기에 화장실 내 의자를 활용하기로 했다. 엄마는 하얀 의자에 앉아 고개를 뒤로 최대한 젖혔다. 티는 안 냈지만 엄청난 긴장감이 나를 지배했다. 10년 전 벌벌 떨며 신생아의 머리를 감쌌던 심정과 비슷했달까. 망막 사건이 터지기 전 듬성해지는 머리는 엄마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행여나 머리카락 손실이 없도록, 행여나 눈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한 가닥 한 가닥 정성스럽게 감겨 드려야 했다. 하지만 긴장한 탓에 이내 엉망진창이 되었고 환자복이 흠뻑 젖어 버렸다. 간호사 선생님께 링거를 꽂은 채 환자복을 갈아입는 법을 배웠다.
핏덩이 같던 내 아이를 함께 보던 100일, 아니 엄마가 나를 보듬어준 긴 시간들에 비하면 지금 이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마음은 부모,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당연한 도리라기보다는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받은 깊은 수준의 마음과 지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병원 침대에 어정쩡하게 앉아 샐러드를 아삭아삭 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