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여행지는 대만으로 정했다.
내 인생에는 자랑과 굴욕이 있고, 사랑과 미움이 있고, 행복과 슬픔이 있다.
하지만 여행하는 동안에는 그런 구분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여행의 모든 순간은 환하게 빛났다.
정여울, <여행의 쓸모>
1.
코로나가 풀리고 많은 지인들이 대만 타이베이로 떠났다. 베이징 귀국 2년의 시점이 다가오며 나도 다시 중화권에 가서 중식을 먹고, 중국어를 써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꿈틀. 심이도 유튜브의 각종 대만 먹방 영상에 마음을 뺏겼다. 때는 마침 여행이 절실한 시기였다.
높은 자존감 하나로 버티는 나지만 종종 자신감이 바닥을 친다. 나만 멈춰 있는 듯한 느낌, 결국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하기가 싫고 무기력의 세계로 끝없이 들어간다. 음악이나 소설이 더 이상 내 삶의 어떤 구원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아무런 여유 공간도 없어서 재생 버튼을 누르거나 책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도 벅차다.
이럴 때는 무조건 걸어야 한다. 굵게 호흡하며 무기력들을 내 몸에서 밀어내야 한다. 땀과 함께 저 멀리 떠나보내야 한다. 그 연장선상에 여행이 있다. 사회적 자아나 책임이 묽어지는 여행이라는 울타리.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중요해지는 여행이라는 한정된 시간. 그 안에서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옅기만 하다. 정여울 작가가 말한 '내 인생의 자랑과 굴욕, 사랑과 미움, 행복과 슬픔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
이 도시가 보여주는 것들을 행여라도 놓칠세라 나는 그저 순간에 깨어 있고 싶을 뿐이니까. 흔하게 접한 '카르페디엠', 베이징에서 항상 마음에 품고 있던 단어 '活在当下(현재를 살자)'의 정신이 최대한 발현되는 여행자의 시간이다.
모든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을 경험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좋았던 여행도, 나빴던 여행도 있었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진실은 모든 여행은 나를 변화시켰으니까.
당장 떠나고 싶다. 망설일 이유가 없지. 다음 해외여행 목적지는 대만으로 정했다.
2.
내 마음속 대만은 이미 다정하고 아름다운 곳. 대만을 다녀온 지인들의 감탄도 있었지만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에서 만난 정세랑 작가의 문장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타이베이를 떠나기 직전엔 길 가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당신이 사는 도시 정말 근사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런 소망을 안기게 하는 도시라니, 대체 얼마나 다정하고 좋았던 걸까. 다음 여행지는 대만 타이베이로 정했다.
대만 여행 계획을 주변에 소문냈더니 대만에서 주재원 생활을 한 춘의 선배들이 맛집 리스트를 건네줬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이렇게 마음을 써주시니 한껏 든든해졌다. 다정한 마음은 모든 것을 감싸고, 모든 것을 녹인다. 다들 타이베이를 구경하는데 3박 4일이면 충분할 거라고 했지만 일상을 닮은 긴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는 9일 간 머무르기로 했다. 대만 일주를 해도 충분한 시간이다. 마지막날 타이베이를 걸으며 조만간 다시 올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기용 작가는 <아무튼, 기타>에서 '누군가 3분을 내서 내 음악을 듣고 그걸 기억했다가 다시 한 번 더 듣는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했는데 노래도 아니고 여행이라면 얼마나 두터운 기적일까. 몇 개월 후 우리는 다시 대만으로 떠났다. 이번에는 타이베이에서 시작해 타이중, 타이난을 거쳐 가오슝으로 마무리하는 일정이었다. 이 글과 사진들은 20일가량 대만에 머무르며 만난 순간, 그 안에서 찾은 이야기들이다.
3.
대만의 다정은 여행 전부터 한껏 실감할 수 있었다. 대만은 본국을 찾는 자유여행객에 한해 여행지원금을 뽑을 수 있는 '럭키드로우'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당첨금을 듣고 한껏 놀라고 말았다. 무려 21만 원 상당. 2만 원도 아니고, 12만 원도 아니고 21만 원이라니. 찾아보니 지원금에 당첨됐다는 후기가 생각보다 많아서 더욱 들떴다. 심이는 럭키드로우가 당첨되는 법을 연구하고, 춘은 혹시 당첨될 경우 어떤 형태로 지원받을 것인지 살폈다. 나는 당첨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고민하며 열심히 맛집을 검색했다.
2시간 조금 넘게 날아가 도착한 대만 송산 공항의 출국 문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럭키드로우. 실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기대를 최대한 가라앉혔지만 마음은 눈치 없이 계속 부풀었다. 먼저 해보겠다고 야심 차게 심이가 나섰다. 본인의 연구 결과에 기반해 제일 빨리 떨어지는 별을 클릭하는 순간! "축하합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이럴 수가. 이렇게 쉽게 당첨되다니.
물론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춘과 나는 실패했다. 하지만 한 명이라도 당첨됐다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지원금 사용 방법을 알려주시는 공항 직원분의 얼굴에 미소 가득했다. 대만의 명물은 펑리수도, 누가 크래커도 아니고 친절한 대만인이라는 문장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송산 공항의 안개는 가득했지만 즐거운 여행이 시작됐다.
+) 대만의 다정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실은 타오위안 공항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MRT(전철) 요금이 이지카드 마이너스 60TWD까지 지원된다는 것이다. 공항 철도가 150위안이니 이지카드에 90이상만 있으면 무사히 탑승할 수 있다. 105위안 남았던 나는 45위안을 지원받은 셈. 처음부터 끝까지 여행자에게 무척이나 다정한 대만이라는 나라.
대만 여행의 인상적인 장면들
타이베이의 골목
역사가 살아 숨 쉬던 디화제에서.
내내 마음이 포근하던 베이터우 온천 마을.
다정한 나라, 다정한 도시에서 마법 같은 시간을 보내다.
럭키드로우 뽑기 전 기 모으는 심이
항공권에 기재된 대만 도착 시간의 1-7일 전에 신청하면 되는 럭키드로우
단체 여행은 혜택이 없고 자유여행객에 한해 기회가 있다.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