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클한 순간들을 모아가는 여행
1.
'이런 더위에도 폭동을 일으키지 않는 대만 사람들'이라던 <혼자라니 대단히 멋지군요>의 안나 작가의 표현을 한 번 더 인용해서 대만 사람들은 다정할 뿐 아니라 불평 지수가 낮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엄청난 폭염에도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웬만하면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20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지나치게 소란스럽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야시장의 시끌벅적함도 적절한 수준이었다)
대만은 중국 본토와 달리 번체자를 사용하지만 발음은 거의 동일하다. 웅얼거림을 극대화시키는 중국 북방식 얼화가 빠진 것만 빼면. 그러니 알아듣기에는 대만의 중국어가 훨씬 쉽고 늬앙스도 다정하게 들린다. 얼화가 빠진 나긋나긋한 만다린을 듣는 상쾌함이란!!!
대만 드라마를 많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대만인의 발음과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세련됐다. '메이셜' 아니고 '메이쓰'를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만 대표 배우 허광한의 청량한 얼굴이 떠오르고 청춘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 기분이 좋아진다. 호텔의 이것저것을 설명해 주는 남직원의 세련된 발음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멍하게 듣고 있었다.
2.
대만 사람들의 다정은 아침을 파는 중산로의 작은 가게, <대왕한보전>에서부터 실감했다. 우리가 아침을 먹기 위해 쭈뼛쭈뼛 어리바리 가게로 들어서자 셋이 함께 앉을 만한 자리가 없었다. 살짝 고민하는 우리를 본 한 커플이 조용히 바 테이블로 이동했다. 사장님의 부탁이나 여기 앉으시라거나, 하는 권유도 없었다. 그저 사사삭 자리를 만들어 줬을 뿐. 상대의 부담과 미안함까지 생각하는 그 츤데레적인 친절함에 우리는 최고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스린야시장에서 만난 모자 가게 사장님은 우리가 고르는 모자마다 어떻게 쓰면 좋은지 아주 친절하게 설명한 뒤 바람처럼 사라졌다. 처음에는 바빠서 재빨리 가셨겠지 했는데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손님에게 구매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목소리 톤, 제스처, 미소, 사라지는 속도 등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조화로워서 과하지 않은 완벽한 친절을 받은 느낌이었다. 심이와 나는 아직도 기분 좋은 친절을 마주할 때마다 '스린야시장의 모자가게 사장님'을 대화의 주제로 올리곤 한다.
<대만 산책>의 저자 류영하 교수는 책의 서문에 '대만인들은 낯선 사람에게도 적의가 없다'며 '대만인들은 왜 친절할까?'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구하는 것이 책의 목표라고 적었는데 짧게 경험한 대만인의 친절은 조금 신기할 정도였다.
3.
외국에만 나가면 작동되는 심이의 한국인 센서(엄마, 저 사람 한국인 같아!)는 대만에서 실로 분주했다. 첫 대만 여행에서 깜짝 놀란 점은 한국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는 것인데 한국인에게 특히 유명한 키키레스토랑에 있을 때는 과장을 조금 보태서 이곳에 있는 손님 중 90%가 한국인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다. 한국인들이 자주 가는 스팟을 중심으로 한국어를 잘하시는 대만 분도 많다. 키키레스토랑에서 내가 '请来这个一份(이 메뉴 하나 주세요)'라고 하니 직원분이 나보다 더 정확한 발음으로 “두.부”라고 하셨다.
런던 대영박물관, 파리 루브르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러시아의 에르미타주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5대 박물관 중 하나로 대만에 처음 간다면 들러보면 좋을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서도 한국인 능력자를 만났다. 오디오 가이드 사용법을 알려주시는 직원분이 꽤나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오랜만에 중국어를 쓸 수 있는 환경에 들떠 있던 나는 김이 좀 새기도 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환대였다. 한국 관광객들에게 최고의 친절을 베풀기 위해 그들은 단체로 한국어 기초 강의라도 수강한 것일까?
다정함은 역시 전염성이 강하다. 나는 타이베이를 걸으며 순간 순간 순해졌다. 귀국 후 집에 오는 공항버스에서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일본인을 만났다. 안절부절하며 지도를 보는 것이 마음이 쓰여 먼저 내릴 곳을 물어보고 친절하게 안내했다. 그는 버스에서 내리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대만이 아니라 다른 곳을 다녀왔어도 그렇게 재빠르게 친절했을까? 아마도 다른 누군가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다리며 눈치 게임을 했겠지.
환대는 이렇게 돌고 돌아 대만의 다정이 일본에 닿았다.
4.
대만에서 나는 자주 뭉클했는데 이 귀한 감정은 어떤 '것'을 볼 때보다는 '그 공간의 누군가'를 유심히 바라볼 때 대부분 생겨났다. 마스다 미리의 <뭉클하면 안 되나요?>에는 그녀가 일상 속 여러 사람들에게서 포착한 뭉클의 순간들이 모여져 있다. 자전거를 타면서 간식을 먹는 누군가의 모습에서, 전철에서 열심히 어떤 책의 상(上)권을 읽고 가방에서 하(下)권마저 꺼내 읽는 누군가의 모습에서, 빌려준 책에서 마주한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밑줄에서 그녀는 순간순간 뭉클한다. 나이가 들수록 뭉클한 감정을 느끼기 어렵다는 친구의 고백에 '잘 찾아보면 뭉클할 일이 이렇게 많아!!!'라고 당당하게 답하는 마스다 미리.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언젠가 죽어버릴 우리에게 주어진 사소한 포상, 그것이 뭉클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여행은 뭉클한 조각들을 모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나와는 다른 국적의,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충실하고 다정하게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모든 문제의 정답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서 그렇다. 고속철도에서 만난 책 읽는 아저씨, 야시장에서 만난 굴전 만드는 할아버지, 작은 호텔에서 싱그러운 웃음으로 일하는 스태프, 융캉 초등학교 학생들의 까르르 웃음들. 너무나 다르고 제각각 자유로운 사람들이 빚어내는 뭉클한 순간들을 차곡차곡 담으며 여행을 한다. 내 일상도 누군가의 여행에 뭉클한 배경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걷는다.
닝샤야시장에서 굴전 만드는 할아버지
완벽한 한 컷을 선사해준 커플
츤데레적 친절을 맛본 중산의 아침 가게
아직도 사장님이 생각나는 스린야시장의 모자 가게 (결국 하나 구입했지요)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