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 야시장 프로젝트
직접 가봐야 느낄 수 있는 장소의 정신이라는 것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에펠탑이, 누군가에게는 도쿄타워가 그렇다.
김상수, <편도 티켓이라도 괜찮아>
1.
길거리 음식에 진심인 우리가 대만 여행에서 제일 기대했던 건 야시장 투어다. 인파와 먹을거리, 넘쳐나는 흥분이 범벅되어 요상한 활기를 띠는 곳. 오랜만에 맡을 취두부의 (썩은)냄새까지 괜찮다는 너그러운 마음을 탑재하고 야시장으로 향했다. 지파이, 고구마볼, 감자치즈, 버섯구이, 오징어 버터구이, 스테이크, 후추빵, 탕후루까지... 야시장은 멈추지 않고 다섯 발자국도 나아가기 힘들 정도로 맛있는 게 많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녁을 먹지 않고 빈속으로 오는 건데...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한국에 돌아온 심이는 밤이면 밤마다 대만 야시장을 그리워했다. 몇 개월 후 다시 대만행 비행기에 오른 이유는 야시장에 대한 짙은 아쉬움 때문이다.
두 번째 대만 여행의 목표는 배부르지 않은 상태로 매일 야시장에 가서 배 터질 때까지 마음껏 먹기. 1일 1야시장 프로젝트는 성황리에 끝나 우리는 4개 도시의 아홉 개 야시장에 들러 자타공인 야시장 마니아가 됐다. 야시장은 겹치는 메뉴가 많은 곳이니 매일 가면 조금 지겹지 않을까 싶지만 네버! 각 장소마다 특색이 달라서 매번 처음 간 듯 즐겁습니다.
2.
타이베이에서는 총 4개의 야시장에 들렀다. 도교 사원을 옆에 끼고 직선 형태로 발달한 라오허제 야시장은 후추빵과 떡빙수가 유명하다. 대파와 후추, 돼지고기소를 가득 채운 만두를 화덕에 굽는, 빵과 만두 사이 어딘가의 후추빵은 미슐랭의 인정도 받은 곳이다. 줄이 길지만 화덕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후추빵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내 차례다. 후추는 대만의 특산품이기도 하니 놓쳐서는 안 될 야시장 먹거리.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떡빙수는 가히 인상적이다. 시원한 얼음에 뜨겁디 뜨거운 떡을 얹어 먹으니 별미 중의 별미라 떡을 좋아하지 않는 심이도 매일 떡빙수 노래를 불렀다. 라오허제 야시장 근처에는 유명 유튜버 쯔양이 들린 철판구이집이 있는데 배가 너무 불러서 시도하지 못했다.
어마 무시한 규모의 스린야시장에서는 얼굴만 한 지파이와 왕자 치즈 감자, 숯불에 굽는 새송이버섯을 먹었다. 닭고기를 얇게 펴서 튀긴 지파이는 흔한 치킨 맛이겠지 했는데 갓 튀긴 데다 단짠스러운 양념과의 조화가 훌륭해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겉은 바삭, 속은 부드러운 감자에 진하고 고소한 치즈를 듬뿍 끼얹어 브로콜리, 베이컨, 옥수수, 참치 등 원하는 재료를 얹어 숟가락으로 퍼먹는, 맛.없.없(맛 없을 수 없는)의 대표 주자 '왕자 치즈 감자'도 말해 뭐해. 미리 맥주를 사두는 것을 잊지 말자.
규모는 작지만 맛으로는 최고 수준이라 '타이베이의 위'라고 불리는 닝샤야시장에는 미슐랭 굴전이 있다. 고구마 가루와 감자 가루를 섞은 반죽에 신선한 굴과 야채를 넣어 뜨근한 철판에 부치는 굴전은 대부분의 야시장에서 파는 대중적인 메뉴지만 할아버지 셰프님이 부쳐주시는 닝샤야시장의 굴전이 압도적이다. 사대야시장에서는 대만의 떡볶이라고 불리는 국민 메뉴 '루웨이'와 84년 오픈 이후 한자리를 지킨 '쉬지 셩지엔빠오'에서 상하이 스타일의 군만두를 먹었다. 마치 폭죽처럼 육즙이 팡팡 터지는 셩지엔빠오에 감동받아 두 번이나 추가 주문을 했다. 타이중 펑지아야시장에서는 관자 꼬치와 찹쌀 소시지가, 타이난 우성야시장에서는 숯불에 구운 오징어와 마라맛 어묵꼬치가 베스트였다. 해산물이 유명한 가오슝 리우허야시장에서는 바지락 찜을, 루이펑야시장에서는 숯불에 구운 각종 꼬치를 먹었다. (세 번이나 추가 주문을 한 환상적인 꼬치!)
목이 마를 때는 과일쥬스(특히 수박)와 동과차, 밀크티를 벌컥벌컥 마셨다. 동과차는 동과와 설탕을 오랜 시간 삶아 즙으로 만들어 굳힌 다음 필요한 만큼 덩어리의 일부를 잘라서 물에 녹이는 방식으로 만든다. 설탕을 함께 만들어 굳혔기 때문에 별도의 첨가물이 필요 없으며 특유의 상쾌함으로 여름철 대만 여행의 필수 음료로 꼽힌다. 홍콩식 번과 총요우삥, 고구마볼, 탕후루는 야시장의 단골 메뉴다. 각 야시장마다 조금씩 달라서 비교해가며 먹는 재미도 있다.
대만 야시장에는 각종 게임과 쇼핑 스팟도 많다. 새우를 잡아 바로 구워 먹는 잔인한 낚시게임, 익사이팅한 사격, 농구 게임 등 많았지만 심이는 작은 고리를 던져 음료수를 따내는 게임을 가장 좋아했다. 꽤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몇 백 개의 병뚜껑이 째려보는 듯한 압도적 광경 앞에서 고리는 자주 힘을 잃었다. 승부욕에 불타오른 원씨들은 몇 번의 재도전 끝에 게임 비용보다 훨씬 저렴한 음료수를 받고 환호했다.
쇼핑하기 가장 좋았던 야시장은 타이베이 스린야시장과 나혼자산다 팜유 패밀리가 들러 유명해진 타이중 펑지아야시장이다. 심이는 마음에 드는 야구잠바와 모자를, 춘은 기모 후드를, 나는 대만 여행 필수품인 동전지갑을 득템에 한국에 와서도 애용하고 있다.
3.
그렇다면 야시장 투어에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당신이 대문자 J 여행자라 할지라도 이곳에서는 '비어있는 위' 말고 다른 준비는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야시장에서는 길게 늘어선 줄이 곧 가이드북이니까. 줄은 사람들의 시간이고 귀한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앨러스테어 험프리스의 <모험은 문밖에 있다>에서 나온 신조어인 ‘마이크로 어드벤처(Micro Adverture)’를 기억하자. 문자 그대로 당장 문밖에 나설 용기와 도전 정신을 탑재하고 소소한 탐험과 모험을 즐기는 방식인 이 마음가짐이 대만 야시장을 헤매는 여행자에게 찰떡처럼 어울린다. 새로운 메뉴가 널려 있고,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하니 부담 없이 시도할 수 있다. 줄이 길다면? 호기심이 생긴다면? 이게 내 인생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면? 한 번쯤 새로운 맛을 시도해 볼 것을 권한다. 맛있으면 맛있으니 좋고, 맛이 없으면 수다로 떨만 한 이야기가 생겼으니 좋다. 마음껏 길을 잃고 마음이 끌리는 대로 움직이자.
4.
야시장 문화를 연구하는 위순더에 따르면 대만의 야시장은 '인파의 힘과 범람하는 상품, 넘쳐나는 흥분 속에 스스로 빠져들도록 내버려두는 곳'이다. 단순한 먹거리 이상의 것, 야시장만이 줄 수 있는 흥분과 쾌감이 확실히 있다. 그러니 아무리 방구석에서 각종 정보를 찾아본다 한들 부족하다. 야시장은 '직접 가봐야만 알 수 있는 장소의 정신'이 존재하는 곳이니까.
고약한 취두부 냄새(그런데 취두부도 막상 먹어보면 생각보다 맛있다.)가 진동하는데다 너그러운 위생 기준을 적용하는 대만 야시장을 모두에게 추천하기란 어렵다. (실제로 스린야시장 감자치즈를 먹으며 큰 쥐 한 마리를 목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만에 가신다면 한 번쯤은 들러서(부모님, 어린아이와 함께라면 평일 오픈런을 추천) 야시장만의 정서를 직접 느껴보시길.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의외로 영혼과 위의 안식처를 만나 향수병에 시달리다 몇 개월 뒤 다시 천국행 비행기에 실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