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루이 Dec 02. 2024

너그러운 타이중에서 만난 여행자의 초심

당신이 생각한 여행이 아닐 거야

그런데 왜 이곳 제주도가 당신이 생각한 제주도여야만 하죠? 자신의 관념 속 제주도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제주도를 경험하기 위해 한 달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내어 이곳에 온 게 아닌가요?


류시화,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1.

참으로 직관적인 대만의 도시 이름들. 대만의 북쪽 '타이베이'에서 대만의 중간 '타이중'으로 이동한 뒤 대만의 남쪽 '타이난'으로 가는 일정이다. 서울과 유사한 타이베이, 부산과 유사한 가오슝 중간에 위치한 타이중은 대전과 비슷한 느낌인데 첫인상은 아기자기하기보다 무게감이 있었다. 타이베이가 무지개색이고 타이난이 파스텔톤에 가깝다면 타이중은 묵직한 그레이랄까. 그렇다면 이곳은 노잼도시인가? 대전이 성심당과 한화이글스를 바탕으로 '유잼도시'로 거듭나고 있는 것처럼 타이중도 인기 예능 프로그램 '나혼자산다' 팜유투어를 계기 삼아 본격 여행지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 타이베이와 타이난, 가오슝에 비해 물가가 싸다. 숙소비와 야시장 꼬치 가격을 비교해 보니 단번에 알 수 있다. 우리 숙소인 호텔 이스트 타이중은 추석 당일 1박 가격이 6만 원 정도(3인이 잘 수 있는 침대 2개짜리 방)였는데 무려 하루 종일 무료로 아이스크림을 제공하고 3시부터 5시까지는 '애프터눈 티'를,  8시부터 10시까지는 '나이트 스낵'을 제공해서 우릴 놀래켰다. 애프터눈 티 시간에도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마파두부, 어묵탕 등이 푸짐하게 놓여 있고 심지어 맛있다. 야시장에서 돌아온 밤 열한시, 공짜 타로맛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과연 이 호텔은 이렇게 퍼주고도 흑자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심각하게 토의했다. 


타이중의 너그러움은 버스비에서도 실감할 수 있다. 여행 경비도 줄이고 현지인의 삶도 살짝 느껴볼 수 있으니 여행지에서는 대중교통을 선호하는 편인데 타이중에는 전철이 없다. 대신 10km 반경 안에서 버스 비용이 무료다. 뭐 이런 너그러운 정책이 있지. 물론 타고 내릴 때 교통카드를 잘 찍고 내려야 한다. 10km 무료 혜택을 꼭 누려보고 싶었으나 1박 2일의 짧은 일정인데다 택시비가 저렴해 우버를 타고 다녔다. 별안간 타이중은 택시 알레르기가 있는 내가 '24시간 내 택시를 가장 많이 탄 도시'가 됐다. 

묵직했던 타이중의 첫인상

2.

그런 너그러운 타이중에서 염치없이 고작 1박 2일을 머물렀다. 머물렀다기보다는 스쳐 지나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연휴가 겹친 탓에 가고 싶은 식당들은 대부분 문을 닫아서 '타이중에서 이곳만큼은 꼭 가봐야지'라고 체크해 둔 스팟들도 경험하지 못했다. 


타이난으로 이동하기 전 하나라도 더 보고 싶어서 택시를 타고 간 심계신촌(션지뉴빌리지)도 사진과는 많이 달랐다. 해 질 무렵 풍경이 예뻤는데 땀이 뻘뻘 흐르는 한낮의 한가로운 골목은 별게 없었다. 타이베이에 대한 그리움과 타이중에 대한 불만이 쌓여갈 무렵 잠시 들린 편집 소품샵 창문에 '초심'이라는 단어가 걸려 있었다. 뜨끔한 기분으로 생각하게 된 여행자의 초심. 편한 소파와 익숙한 침대가 있는 집을 두고 우리가 매번 여행을 꿈꾸는 이유. 새로움을 맞닥뜨리고 조금 더 자유롭게 위해서,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조금 더 함께이기 위해서, 결국 내 선입견과는 다른 무언가를 마주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누가 등 떠밀어 떠나온 것도 아니면서 가끔 초심을 잃고 뾰로통한 여행자가 된다. 비를 뿌리는 하늘에, 영업하지 않는 노포에, 생각보다 맛이 없는 디저트에 삐져버린다. 단단한 오해를 뒤로하고 그 도시를 떠나기도 한다. 나에게는 최고의 도시가 너에게는 최악의 도시가 될 수 있는 여행이라는 신비로운 세계를 성의 없이 마주한다. 


최근 읽은 류시화 시인의 에세이 문구를 제주도가 아닌 다른 도시로 바꾸면 간단해진다. 왜 이곳 타이중이 당신이 생각한 타이중이어야 하죠? 자신의 관념 속 타이중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타이중을 경험하기 위해 소중한 시간을 내어 이곳에 온 게 아닌가요?

3.

갑작스러운 폭우로 일정을 거의 성공하지 못한 마지막 도시 가오슝. 야경을 보러 들린 시립도서관에서 우리는 하늘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한참을 비 구경만 했다. 속상한 마음을 티 내지는 않았지만 여행의 막바지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야시장 일정을 건너 뛰고 일찍 숙소로 들어와서 쉬었다. 


다음 날, 좀처럼 바뀌지 않는 아이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 어제의 비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이는 이렇게 덧붙였다. 


-비오는 가오슝 도서관 정말 예쁨, 강추!


그 사진을 보며 깨달았다. 아이는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여행자라는 것. 아이는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이 생각한 여행이 아닐 거야. 그러면 어때. 


당신이 상상하는 지구 행성이 아닐 거야. 당신이 생각하는 인생이 아닐 거야. 그래서 하루하루가 난해하면서도 설레고 감동적일 거야. 자신의 관념과 기준 속에 갇혀 있지만 않는다면, 당신이 상상한 것보다 더 좋은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눈을 크게 뜬다면. *같은 책 


아이의 마음을 빌려 여행자의 초심을 가다듬는다. 

타이중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