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기'에 있던 여유
전주 도서관 여행에 이어지는 독립서점 투어.
전주독립서점 <일요일의 침대>로 가는 골목길에서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 왔으?", 나에게 말을 거신 게 맞나 확인하러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대답했다. "서점...이요", "아, 즈기여 즈기"
'즈기'에 일요일의 침대가 있었다. 주말의 여유로움과 침대의 포근함을 더해줄 책 1권을 권하는 전주 독립서점. 낭만적인 이름도 좋았지만 침대글방 등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어서 특히 기대한 곳. 한옥마을에서도 객리단길에서도 조금 떨어진 위치였는데 아무리 지도를 유심히 살펴봐도 위치가 그려지지 않았다.
올해 봄 오픈한 일요일의 침대는 서점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골목, 정겨운 할머니가 계신 <보배제과>옆에 있다. 바로 옆에는 힙한 느낌의 소품샵 <Clip a day>가 있는데 이날은 문을 닫았다. 일요일은 침대는 아담하지만 정성이 가득하다는 느낌. 정갈하다는 표현이 책방에도 어울린다면 이곳은 그런 곳이다. 작은 공간이지만 안쪽에 꽤 널찍한 책상이 있어서 대표님이 구상하는 여러 가지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완성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었다.
서점 창문에는 일요일의 침대, 이달의 베스트셀러 목록이 붙어 있다. 1위는 계절참견 청개구리 여름호. 2위는 김신지 작가의 제철행복&자몽살구클럽. 이어서 아무튼 여름과 공룡의 이동경로, 첫 여름, 완주&동경. 독립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만 제대로 살펴봐도 때로 그 공간에 대해 한층 이해하게 된다. 책방 한가운데 놓인 올해의 책은 <오춘실의 사계절>이었는데 다른 서점에서도 본 기억이 있어 호기심이 생겼다. 편집자 김효선이 적은 엄마 오춘실에 관한 이야기다.
막연한 행운이 먼 곳에 있다는 게 그리 싫지 않았다. 물에 잠길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누구 좋으라고 비켜. 사는 게 이렇게 좋은데. 사는 게 정말 좋다는 건 엄마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이다.
<오춘실의 사계절>, p.254
암요, 누구 좋으라고 비켜!라고 생각하며 '오늘의 단어'와 '일요일의 침대에 어울리는 플레이리스트'를 추천하는 작은 노트가 있는 책상에 앉았다. 어떤 노래를 추천해야 하지? 고민하다가 생각했다. 이곳의 플레이리스트는 이미 완벽해. 뭔가 몽환적이면서 따뜻해서 작은 공간과 잘 어울렸다. 그중 하나는 가수 오존의 <기억이란 사랑보다>. 가수 이문세 원곡 리메이크 버전인데 참으로 감미롭다. 카더가든 유튜브에서 보드게임하던 사람 정도로 오존을 알았던 나로서는 당황스러울 만큼의 감미로움이다.
일요일의 침대 샘플북에는 연필로 그어진 밑줄이 있다. 대표님이 그은 것이겠지. 최진영 작가의 책에는 매 페이지에 밑줄이 있었다. 연필로 그어져 더 정감 있는 밑줄. 남의 밑줄 읽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최고의 책. 최진영 작가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 몇 개의 소설을 추천받았다.
최진영 작가의 에세이 <내 주머니는 맑고 강풍>을 읽고 나도 최작가님에게 빠질 것 같았는데 그녀가 한화이글스 팬이어서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한화이글스 팬이라 특별히 더 마음이 간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그것도 그냥 팬이 아니라 아주 성실한 팬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최작가님의 하루 루틴에 야구 시청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부터 한화팬인 걸 알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겨울에 주로 장편소설을 쓰는 이유는 야구가 없기 때문이라고 밝히며 '물론 제가 응원하는 팀은 가을부터 야구를 안 하지만'이라고 덧붙였는데 이 문장을 보자마자 느낌이 왔다. 마치 작당한 것처럼 가을에는 절대 야구를 하지 않는 두 팀이 생각났고 <내 주머니는 맑고 강풍>을 몇 장 넘겨보니 과연 그녀는 한화 팬이었다. 몇몇 문장을 읽으며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에 나는 '프로선수도 10연패를 하는데 나도 10연패 할 수 있지'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10연패 다음에 1승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좌절도 좌절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나를 리빌딩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최다 연패 타이기록도 세운 독수리들에게 10연패는 대수도 아니지. 야구가 별건가. 스트라이크는 치고 볼은 걸러내고 달릴 수 있을 때 달리고 잡을 수 있는 공은 잡고 던질 수 있는 공을 던지는 게 야구지. 근데 그게 어렵다. 투수 잘 던지고 타자 잘 치고 수비 실책 없이 이기는 날은 손에 꼽힌다는 걸 잊지 말자.
인생이 별건가. 닥치면 하고 안 닥치면 안 하고 누워 있을 때 눕고 맛있는 거 있으면 먹고 웃음 나면 웃고 뭐 그런 거지. 근데 그게 어렵다.
고선경 시인의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을 샀다. 나는 읽었고 선물용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시집을 선물받는 일에 크게 놀라지 않을 사람에게 선물할 생각이다. 근데 고시인님의 시가 정말이지 재밌거든요. 그러니 선물 받아도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매일 걷는 골목을 걸어도 여행자가 된 기분인데요
아차차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럭키슈퍼 중>
일요일의 침대 책상 위 작은 노트에 적힐 오늘의 단어는 '우연'이 되었다. 강릉 여행을 준비하다 우연처럼 전주행 기차에 몸을 싣고 우연에 기대 이 서점에서 생기발랄한 글을 읽는다.
나는 나를 믿어요.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오직 나를 믿고 있어요. 부디 내가 나를 계속 믿어주면 좋겠습니다. 실망하면 어떤가요. 어차피 나만 아는 일. 괜찮을 겁니다.
최진영, <내 주머니는 맑고 강풍>
불안의 한 가운데서 사실 내가 하는 일. 오직 나를 믿는 일. 어차피 나만 아는 일.
일요일의 침대를 나서며 이 문장을 읊조린다.
+ 일요일의 침대 영수증 하단에는 <누들로드 인 전주>가 프린트되어 있다. 대보장, 도파멘 등 전주 누들 맛집이 이유와 함께 추천되어 있다. 다음 전주 여행을 위해 모두 즐겨찾기 완료.
+ 일요일의 침대에 김신지 작가의 북토크가 진행되어 있었다. 섭외력 무슨 일이죠?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