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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 Apr 26. 2024

생의 완벽을 꿈도 꾸지 못했으리

심보선 <노래가 아니었다면>

  노래가 아니었다면


   결점 많은 생도 노래의 길 위에선 바람의 흥얼거림에 유순하게 귀 기울이네 그 어떤 심오한 빗질의 비결로 노래는 치욕의 내력을 처녀의 댕기머리 풀 듯 그리도 단아하게 펼쳐놓는가 노래가 아니었다면 인류는 생의 완벽을 꿈도 꾸지 못했으리 강물은 무수한 물결을 제 몸에 가지각색의 문신처럼 새겼다 지우며 바다로 흘러가네 생의 완벽 또한 노래의 선율이 꿈의 기슭에 우연히 남긴 빗살무늬 같은 것 사람은 거기 마음의 결을 잇대어 노래의 장구한 연혁을 구구절절 이어가야 하네 그와 같이 한 시절의 고원을 한 곡조의 생으로 넘어가야 하네 그리하면 노래는 이녁의 마지막 어귀에서 어허 어어어 어리넘자 어허어 그대를 따뜻한 만가로 배웅해주리 이 기괴한 불의 나라에서 그 모든 욕망들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새카만 재로 소멸하는 그날까지 불타지 않는 것은 오로지 노래뿐이라네 정말이지 그러했겠네 노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생의 완벽을 꿈도 꾸지 못했으리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사, 2008.


 강이 붉게 물든 날이다

 치욕과 굴욕을

 욕망과 절망을

 배에 싣고 떠나는 날이다 


 무수한 물결 따라 바다로

 홀로 노 저어 가는 길 


 무거운 것은 강바닥에 가라앉고

 흐르는 것은 노래의 선율뿐


 어허 어어어 어리넘자 어허어

 어허 어어어 어리넘자 어허어 


 바다에 닿는 것은 오로지 노래뿐




10살 먹은 아들이 있다. MBTI 검사를 해보지 않았지만, 평소 행실을 보아 F 성향인 게 확실하다. "엄마 우울해서 빵 샀어."라는 말에 아들은 "왜 우울했어?"라고 물었다. F(Feeling; 감성) 성향의 반응이다. T(Thinking; 이성) 성향은 무슨 빵 샀냐고 묻는다고 한다. 공감보다 궁금한 게 먼저인 거다.


아들의 요즘 최고 관심사는 '죽음'이다. 자기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에 관해 고민이 많다. F 성향의 아들과 T 성향 엄마의 대화는 이렇게 흘러간다.

아들: 엄마가 죽었는데 보고 싶으면 어떡하지?
나: 엄마 사진을 보면 되지.
아들: 엄마랑 얘기하고 싶으면 어떡하지?
나: 얘기하면 되지.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듣고 있을게.
아들: 나를 키워줘서 고마운데 (울컥) 고맙다고 말을 못 해서 어떡하지?
나: (울컥) 엄마가 너를 키우면서 행복했으니까 고맙다고 말 안 해도 괜찮아.

이쯤에서 훈훈하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아들은 매우 집요한 성격이다. 

아들: 엄마가 죽으면 보고 싶으니까 홀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
나: 그래, 엄마가 목소리도 녹음해서 홀로그램 만들어 줄게.
아들: 그런데 홀로그램은 못 만지잖아. 엄마, 미라 알지? 엄마가 죽으면 그걸로 만들면 되겠다. 허그할 수 있게. (무서워지려고 한다.) 
나: 아니야, 그냥 화장해서 묻어 줘.

순리대로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했으나 아니었다.

아들: 엄마, 나노봇(Nanobot) 알아? 그걸 몸에 넣으면 병을 낫게 해 줘서 안 죽는대. 엄마는 그걸 하면 되겠다.
나: (검색해 봄) 나노봇은 아직 개발 중인 것 같은데, 아들이 그걸 만들어보면 어때?
아들: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가끔 이성이 감성을 앞서기도 한다. 공부를 즐겨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엄마를 포기한 건 아니다.

아들: 나랑 엄마랑 같이 죽으면 어때? 나는 안 건강하게 먹어서 빨리 죽고 엄마는 건강하게 먹고 운동해서 천천히 죽고.
나: (뭐라?) 아니야, 아들이 건강하게 먹고 엄마보다 더 오래 살아야지.
아들: 그럼 이건 어때? 나는 70살까지 살고 엄마는 100살까지 살고. (나이 차를 정확히 모르는 듯하다.) 
나: 어.... 그래.
아들: 아니면 나는 80살, 엄마는 110살까지. (오래 살고 싶어 한다.)
나: 엄마는 그렇게까지 오래 살기는 싫은데....

그 와중에 아빠 얘기가 없어서 아빠는 어쩌냐고 했더니 셋이 같이 가자고 한다. 아들이 커서 가정을 이룰 때까지 죽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했지만, 그래도 아들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했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노래를 떠올렸다. 외롭고 힘든 시간에 적적한 공간을 채워줄 노래를. 노래만이 해줄 수 있는 위로를. 


세상의 전부였던 사람을 떠올리게 할 노래.

Ambrosia - Biggest Part of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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