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엄마, 아빠와 헤어지던 날
내 나이 열여섯, 나는 독립을 선언했다.
"나는 엄마에게 종속된 개체가 아니야. 독립된 개체라고."
엄마는 적잖이 당황한 듯 멀뚱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덧 내 나이 서른이 되던 해, 기어코 엄마를 밀쳤다.
"엄마가 남이지, 나는 아니잖아! 엄마도 남이야. 나 아니면 다 남이지 뭐야. 세상에 나는 나뿐이라고!"
엄마는...... 엄마의 눈은 무척이나 슬프고 허망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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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말썽 한번 없던 나였다. 남들보다 1년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한 탓인지 한동안은 느리다는 꼬리표가 붙었지만, 그런 것쯤은 자라니 털어졌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하고 꼼꼼하던 어린이.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어느새 고학년이 된 나는 공부가 즐거운 우등생이 되어 있었다. 별 탈 없이, 성적까지 우수한 자식을 싫어할 부모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싫어하지 않는 것이 좋아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자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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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다. 엄마는 학원 선생님, 아빠는 회사원이었다. 엄마, 아빠가 출근할 때면 나는 외할머니 집으로 갔다. 우리 집과 할머니 집은 8차선 대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건너 마을에 있었다. 나는 엄마가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함께 나가 할머니네로 가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할머니네로 가려면 건너 동네로 넘어가는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엄마와 나는 늘 거기서 헤어졌다. 나만 횡단보도를 건넜고, 엄마는 건너지 않고 그 옆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그 횡단보도 첫 줄이 엄마와 내가 헤어지는 경계선이었다.
하루는 엄마와 헤어지기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끄트머리에 서서 아픈 척을 했다. 엄마는 나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다시 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프지도 않은데 거짓말을 한 나는 죄책감에 속이 울렁거려 정말로 토를 하고 말았다. 엄마는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침대에 눕히더니 머리를 쓸었다. 엄마의 손길을 타고 스며드는 만족감이 죄책감을 잠시 덮었다. 나는 그 따뜻함을 더 즐기고 싶었다. 한껏 아픈 체를 하며 쇠고기 수프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스턴트 쇠고기 수프를 끓여서 가지고 오셨다. 엄마가 해 준 수프를 먹는다는 생각에 신이 나 숟가락으로 크게 한 술 떠먹으려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엄마의 표정을 보고야 말았다. 엄마의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은 내가 아파서 나온 게 아니었다. 나 때문에 예기치 못하게 출근이 늦어져서 나온 난감함과 성가심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엄마 앞에서 아프다는 이야기를 못했다. 그날이 내가 엄마와 처음 헤어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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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있었던 최초의 추억을 떠올리면 서울대공원이 생각난다. 어린이날에 엄마 아빠와 서울대공원에 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당일 아침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일어나 거실로 나왔는데, 엄마는 빨래를 개고 있었고 아빠는 그 옆에 서서 한숨을 쉬고 있었다. 둘이 뭐라 뭐라 말다툼을 하더니 금세 냉랭해졌다. 왠지 나들이가 취소될 것 같았다. 옆에서 가만히 눈치만 보고 앉아 있는데, 아빠가 나가자고 했다.
엄마 없이 아빠랑 둘이 서울대공원에 갔다. 우리는 코끼리 열차를 탔다. 나는 말이 많았고, 아빠는 말이 없었다. 서울랜드에 가서 후룸라이드도 타고, 미니 롤러코스터도 탔다. 나는 좀 더 놀고 싶은데 아빠는 좀 지쳐 보였다. 우리는 인공연못가에 앉아서 쉬었다. 그 연못에는 리모컨으로 조종하는 작은 배들이 있었다. 가만히 앉아 아빠와 배들을 구경했다. 내 옆에 서 있는 아빠는 나랑 놀러 온 것 같지 않았다. 아빠 따로, 나 따로 그곳에 있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기억에 있는 아빠는 어디서나 그랬다. 혼자 온 사람처럼, 우리랑 같이 있지만 그뿐이었다. 아빠와는 헤어질 것도 없었다. 애초에 만난 적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