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빠의 집'을 나서다.
어릴 때는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이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착한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를 끝없이 따지며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자라면서 '성격'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 사람 성격이라는 게 참 제각각이라, 맞고 틀리고를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데에는 아빠의 영향이 컸다. 틀린 게 아니고 다른 것일 뿐인데, 어떻게 선악으로 분별해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놈의 성격차이로 결별도 하고, 이혼도 하지 않나. 나는 성격 차이로 '아빠의 집'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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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부터 취향까지 모든 게 다른 아버지 집에서 사는 것은 절망적이었다. 나는 원체 계획이라는 걸 세우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누가 내 계획에 대해 물으면 귀찮다는 듯 '무계획이 계획이다'라는 말로 일관했다. 반면 영업직을 거쳐 사업가가 된 우리 아빠는 철저한 계획형 인간이었다. 새벽에 해처럼 기상하여 운동을 갔다가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여 기다리는 게 우리 아빠였다. 아빠 하면 루틴, 루틴 하면 아빠였다. 아빠와 나의 이런 성격이 극명하게 갈려 부딪히기 시작한 건 대학에 가고 나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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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서울 남쪽 경계선에 있었다. 대학교는 서울 북쪽 경계선에 있어서 통학이 지옥이었다. 특히 아침에 사람들 틈에 찡겨 한 시간 반 지하철을 타고 있자면 진짜 왜 사나 싶었다. 아침에 꾸역꾸역 일어나는 내가 보기 안쓰러웠던 아빠는, 적어도 같은 라인 지하철까지만이라도 태워다 주겠다 했다. 싫다고 했어야 했는데.
한참 늦잠 잘 나이인 스무 살에 매일 여섯 시에 일어났다. 과제 때문에 늦게 자기도 하고 놀다 들어와서 피곤하기도 한데, 그런 내 사정과 관계없이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아빠가 방문을 두드렸다. 한참 깊이 자고 있다가 난데없이 큰 소리를 듣고 깨어나면 딱 죽을 맛이었다. 머리가 윙윙 울리고 속은 울렁거리고, 아침인데 벌써부터 밤이 되기만 소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알아서 가겠다고 짜증을 내고 소리쳐도 안 통하는 아빠의 일방통행에 울화가 치밀었다.
차 안 막히고 사람 없는 이른 아침에 편하게 학교 가서 자라는 게 아빠의 주장이었다. 아빠 말이 맞았다. 그 새벽엔 차도 안 막히고, 안 갈아타도 되는 역까지 차 타고 편히 갈 수 있었다. 지하철에 사람도 별로 없어 쭉 앉아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내릴 곳을 매번 지나쳐 오히려 다시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게다가 충분히 자지 못해서 강의 시간에 졸기 일쑤였다.
그 피로감이 너무 짜증 나서 아빠에게 안 태워다 줘도 된다고 몇 번을 말했다. 게다가 나는 일찍 가서 기다리는 성격이기보다, 시간 딱 맞춰 땀나게 달려가는 게 내편에 편한 성격이었다. 그렇지만 부지런한 계획형 인간에게 나 같은 사람은 게으르고 비효율적인 인간으로 보일 뿐이었다. 아빠는 내 거절을 차단하고 아빠의 효율성을 실천하기 위해 매일 나를 깨워 역에 내려줬다. 첫새벽에 시름시름 앓는 얼굴로 차에 타는 나에게 아빠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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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을 한다면 내가 해달라는 대로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도무지 그 아빠의 '네 생각'이 누굴 위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우린 취향도 너무 달랐다. 나는 예술가였다. 그림을 좋아하고, 문학을 좋아하고, 사랑 노래를 좋아하고, 달 뜬 새벽의 라디오 소리를 좋아했다. 세상에 돈 보다 중요한 게 얼마든지 많다고 믿었다. 아빠는 사업가였다. 아빠에게 그림은 거실을 빛내는 도구, 아빠의 책장엔 온통 자기 계발서뿐. 같은 새벽이지만 아빠의 새벽은 해 뜨는 새벽이었다. 아빠는 출근길 새벽 라디오를 좋아했다. 아빠의 세상에서는 돈이 가장 중요해 보였다. 돈을 저버린 박애주의적 행동은 아빠에겐 사치, 비효율의 끝이었다.
결국 스물한 살에 기숙사에 지원했다. 통금이 있는 게 싫어서 기숙사는 절대 안 들어가겠다 했었는데, 아빠의 성격과 취향으로 가득한 아빠의 집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대학 다니는 동안은 기숙사에서 지냈고, 졸업 후엔 해외로 취직했다. 점점 집 밖에서 먹고, 자는 것에 익숙해졌다. 집이 그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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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온 후, 지낼 곳이 없어 다시 엄마 아빠 집에 들어갔다. 6년 만에 들어간 엄마 아빠 집은 익숙하기보다 낯설었다. 어릴 때는 그나마 온기라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사라진 느낌이었다. 비가 퍼붓는 날 잠시 비를 피하러 들어간 원두막 정도의 냉기가 나를 막아섰다. 오랜만에 집에서 만나는 부모님은 맞춰가기 어려웠다. 대화를 시도하면 늘 싸움으로 끝나는 날들, 부모님의 비난에 날 선 공격으로 답하는 날들이 지속됐다.
"너랑 대화하면 무슨 시인 이상하고 말하는 것 같아.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를 못 하겠어.
네가 쓰는 단어들은 내가 쓰는 거랑 뜻이 다른 것 같아. 좀 알아듣게 말을 해봐!"
나비가 일으킨 바람처럼 무심코 내뱉어진 말. 그 말은 한평생 가족의 이유를 의심해온 내 마음에 폭풍을 일으켰다. 나는 그날 이후 집에서 나가기 위해 내키지 않던 스카우트 제의에 응해 취직하고, 직상 상사의 집에서 하숙을 하며, 7평이 못 되는 친구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그곳은 내 집이 아니니까. 내가 살아도 되는 곳이 아니니까. 내가 살던 곳은 '우리 집'이 아니라, '아빠의 집'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