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자생적인 가톨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는 전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자랑할 만한 일이다.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로 눈을 돌리고 있던 때에 우리나라는 그들에게 매력적인 나라는 아니었다. 중국이라는 큰 나라와 일찍이 교역을 시작한 일본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 조선. 선교사들에게도 중국과 일본으로의 선교가 우선이었지 조선은 아직 미지의 나라일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중국을 통해 이미 천주교를 접하고 있었다. 실학의 성장으로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렇게 ‘천주실의’도 우리나라 선비들에게 읽혀지기 시작했다. 세상의 이치와 인간의 평등함을 담은 ‘천주실의’에 대한 궁금증은 선비들을 당시 청나라에 있던 선교사와 신부님을 찾아가게 했다. 그들의 만남은 겨자씨가 되어 당시 조선에 한국 가톨릭 신앙을 키우게 된다. 박해와 억압을 겪은 이스라엘 민족처럼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평화와 평등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은 듯, 가톨릭은 조선의 백성들 사이로 빠르게 번져갔다. 서학이었던 천주학이 천주교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들은 유럽 교회로 편지를 보내 사제를 보내주길 청하고,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나라의 박해에도 목숨을 내놓아 신앙을 지키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평신도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일궈낸 한국 천주교회, 그 역사가 바로 우리의 자랑이자 희망이다. 스스로 피어난 꽃을 꺽을 수는 있어도, 피어난 존재의 향기는 막을 수 없다. 신앙의 향기는 곳곳으로 번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신분제도를 넘어, 남녀의 구분을 넘어, 사회 제도를 넘어 평등과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 마음 속으로 단단히 뻗어나간 천주교는 그로인해 오랜 박해의 시간을 겪는다. 천주교인이었던 유학자 윤지충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하여 비판을 받다가 관청으로 끌려가 끝내 처형을 당한다. 당시 유교 사회에서 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관청으로 끌려가 처벌을 받을 만큼 큰일이었다. 이것이 1791년에 일어난 신해박의 시작이다. 이어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병인양요의 시발점이 되는 1866년 병인박해까지. 큰 이름을 받은 박해만 네 번인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천주교 신자는 마을을 벗어나 산 속으로 들어가 숨어 살며 신앙 공동체를 이뤄 생활하거나, 신자로 발각되어 관청에 끌려가 배교의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목숨과 삶을 증거로 신앙을 살아낸 선조들의 이야기가 우리나라 곳곳에 자리한다. 목숨을 바친 순교 성지와 초대교회와 같은 모습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 교우촌 성지. 신앙의 삶이 생생한 곳으로 한걸음 따라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