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가을이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길목으로, 하늘은 높고 푸르고, 바람은 선선했다. 햇볕은 아직 여름의 빛을 담고 있으나 뜨겁지는 않았다. 성지에는 이미 가을이 가득했다. 알맞게 익어가는 나뭇잎이 여기 와서 쉬었다 가라고 말하는 것 같은, 포근한 손골성지이다.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가을이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길목으로, 하늘은 높고 푸르고, 바람은 선선했다. 햇볕은 아직 여름의 빛을 담고 있으나 뜨겁지는 않았다. 성지에는 이미 가을이 가득했다. 알맞게 익어가는 나뭇잎이 여기 와서 쉬었다 가라고 말하는 것 같은, 포근한 손골성지이다.
광교산 자락에 자리한 손골성지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이다. 향기로운 풀과 난초가 무성하여 ‘향기로운 골까지’라는 뜻을 가진 ‘손곡(蓀谷)’에서 유래한 손골은, 기해박해 이후 신자들이 모여 살며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 도리(김 헨리꼬) 신부와 오메트르(오 베드로) 신부가 이곳에서 한국말과 풍습을 배우며 선교 활동을 했다.
병인박해 당시에 손골에는 40여 명의 신자들이 있었는데, 다른 곳으로 피신한 이들도 있었지만 이곳에서 체포되어 순교한 이들도 있다. 1871년 이요한은 아들 이 베드로, 손자 이 프란치스코와 함께 3대가 순교하였다. 또한 그 당시 손골에서 생활하던 신자 네 명이 수원으로 끌려가던 중 개울가에서 처형되어 길가에 버려졌는데, 이들의 시신을 거두어 개울가 작은 언덕에 묻고 돌을 덮어 돌무덤을 만들었다. 여기에 묻힌 이들의 이름과 행적이 알려지지 않아 무명 순교자 돌무덤이라 전해졌는데 현재는 손골성지 내로 옮겼다.
이곳이 성지로 개발될 수 있었던 계기 중 하나는 바로 도리 신부와 관련이 있다. 도리 신부는 이곳에서 지내며, 당시 손골 성지에서 프랑스 고향으로 보낸 편지가 남아 있을 정도로 손골성지에서 오래 지냈다. 도리 신부의 고향인 프랑스 딸몽 성당에서 도리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그 부모가 사용하던 맷돌로 십자가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도리 신부 생가에 모시고 하나는 이곳 손골로 보내왔다. 도리 신부의 순교비를 세우고 그 위에 딸몽 성당에서 보내온 십자가를 올렸다. 순교비는 1966년에 축복되었고 이후 형태를 달리하다가, 2014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지금 유지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박해의 아픔 뿐만 아니라 이곳에 모여 살던 신자들의 오붓한 공동체를 엿볼 수 있는 유물과 기념물이 가득하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역사와 신앙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이곳은 많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가을단풍은손골 #그리스도향기가득 #병인박해아픔 #신앙공동체친교
주소 : 경기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437번길 67
홈페이지 : https://www.casuwon.or.kr/holyland/intro/8
미사시간 : 일 14:00 화~토 1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