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2_까리온-테라딜로스
역대 최고의 코골이였다. 까리온에서 이전에도 만나지 못했고, 이후에도 만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코골이를 만났다. 이렇게 밤을 뒤척인 적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평소보다도 훨씬 더 일찍 일어나 나왔다. 나오는 길에 작가 아저씨를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또 같은 알베르게의 라면 청년도 만났다. 라면 청년과 마을을 빠져 나오며 밤새 잘 잤는지 인사를 나누었는데, 알고보니 우리는 같은 방이었다. 엄청난 코골이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고, 그는 제대 후 처음으로 전쟁나는 꿈을 꿨다고 했다. 맞다, 정말 그 정도의 엄청난 코골이였다.
마을을 벗어나자 바로 나온 것은 긴 산책로와 같은 길이었다. 라면 청년은 북쪽 길을 걷다가 프랑스길로 넘어왔다고 했다. 북쪽길의 풍경을 얘기해주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매일 산을 하나씩 넘었다고 했다. 그렇게 걸어서 해변으로 도착하면 매일 바다 수영으로 하루 피로를 풀었다고 했다. 몰랐던 북쪽길에 대해 알게 되며 또 작은 로망을 품어봤다. 언젠가 북쪽길도 가보고 싶다. 그는 도라에몽 같이 커다란 배낭에 이것저것 다 짊어지고 다녔다. 그래도 될 만한 체격과 체력을 가진 청년이었다. 서로 속도가 달라서 또 볼 수 있으면 보자고 인사를 하고 먼저 보냈다.
제법 긴 길이었다. 보통은 30분에서 1시간 사이면 바르가 하나쯤은 나오는데, 가도가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 어쩌지. 나는 이 길을 걷는 동안 각 길에대한 세세한 정보를 가지고 걷지는 않아서 몰랐다. 이 길은 다음 마을까지 한참 걸리는 길이었다. 다행히 정말 지쳐갈 쯤에 길가에 세워진 작은 간이 바르를 만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데(소화데레사)님을 다시 만났다. 그녀는 이미 길에서 만난 순례객과 같이 있었는데, 나도 합석해서 같이 아점을 먹었다. 내가 영어가 짧아서 매 소통마다 통역을 해주어 소데님이 고맙고 미안하고 그랬다. 여튼, 직선으로 뻗은 길을 소데님과 같이 걷게 되었다. 그녀는 두 번째 오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 왔을 때는 레온부터 걸어서 이번에는 처음부터 레온까지 길따라 걷고 그 후는 다른 길로 빠져 볼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 자기 속도로 걸었다. 이 길이 너무 좋아서, 하루하루가 너무 아까워서 정말정말 천천히 걸었다. 걷다가 좋은 벤치가 있으면 냅다 누워서 쉬고. 나라면 하지 않았을 쉼표를 그녀와 같이 걸으며 하게 되어 좋았다.
중간에 어느 마을에 다다랐을 때, 라면청년(이하 도라에몽)을 다시 만났다. 셋이 바르에 앉아 수다타임이 시작되었다. 소데님과 도라에몽님이 또래여서 그런지 더 대화가 즐거웠다. 둘다 MBTI가 E이고 나는 (당시에는) I였다. 라면청년이 도라에몽이 된 것도 얘기를 나누다 그의 배낭에 별거별거 다 들어있는 것에 대해 소데님의 표현으로 도라에몽이 되었다. 정말 한참 앉아서 놀았다. 그러다가 이 마을을 지나가는 아는 이들이 보이면 인사를 나누곤 했다. 이제 진짜 일어나야 하는데 싶은 즈음에 어느 한국인분이 바르로 다가왔다. 친화력이 좋은 둘은 자연스레 인사를 건네고 그는 우리 테이블에 합석했다. 그리고 또 한참 앉아서 수다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제 진짜 가야 할 시간, 소데님은 이 마을에서 하루 묵어 가기로 하고, 도라에몽과 직장에서 정말 딱 한 달의 휴가를 받아 온 직장인님과 나는 출발해야했다. 도라에몽과 직장인님이 먼저 출발하고 나도 조금더 있다가 출발했다. 그들은 나보다 더 가는 길이었다. 중간에 바르에서 한 번 더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다.
미리 예약을 해둔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내가 예약한 곳은 한국인들은 잘 머물지 않는 마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작았다. 역대급으로 작았다. 그래서 알베르게 순례자 식사를 신청했다. 짐을 풀고 씻고 빨래를 하고 여느 날과 같은 정비를 하고 보니, 발에 발목 뒤편에 큰 물집이 보였다. 이거 터트려야 할 것 같은데, 물집 처리를 어떻게든 해야할 것 같은데. 나는 아무 준비가 없었다. 밴드만 있었지 실과 바늘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지 하며 서성이고 있는데, 어느 한국인 아저씨가 보였다. 대뜸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며 나의 어려움을 토로하니 선뜻 실과 바늘을 빌려 주셨다. 라이터로 바늘을 소독하고 물집에 실을 걸어두었다. 이러면 물집의 물이 실을 따라 천천히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니 실은 빠져 있었고 물은 뒤척이는 몸부림으로 알아서 빠진 듯 했다. 그리고 몹시 쓰라린 물집과 함께하는 걷기가 시작되었다. 여튼.
아저씨도 순례자 식사를 신청하셨다고 해서 우리는 저녁에 같은 테이블에서 다시 만났다. 아저씨는 본인은 술을 잘 못한다며 와인 한 잔이면 충분하다 하시며 우리 테이블에 주어진 와인을 나보고 혼자 다 마시라고 내어 주었다. 아싸! 그리고 혼자 걷는 것이 대견하다 하시며, 한국 돌아가서 이력서 쓸 때 순례길 경험을 꼭 쓰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아주 좋은 경험이라며 빼놓지 말고 꼭 쓰라고 당부를 주셨다. 맞은 편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는데,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휴대폰으로 영상만 보고 계셔서 인사 드리기 어려웠다. 고개를 한 번만 돌려주면 인사 하고 같이 합석하자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도 그만의 순례길 루틴이었겠지 하고 말았다. 아저씨 덕분에 저녁 식사를 편안하게 맛있게 먹은 것 같아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