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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유 Feb 04. 2024

김 대리, 보석이 되어 떠나다 (2)


실력으로 보여주다



"팀장님, 이번 교육은 이렇게 준비하면 어떨까요?"

"작년 결과 보고서를 보니 개선점이 적혀있더라고요. 이번에는 그걸 적용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다른 분들 의견도 들어보니 이 부분을 조금 바꾸면 좋을 것 같아요."


민선이 교육팀으로 온 이후 자주 들려왔던 말들이다. 


솔직히 민선이 맡고 있던 급여와 지금의 교육 일은 결이 많이 달랐다.


급여팀은 주어진 정보들을 분석하고 정확히 산출해 내는 일들이 주를 이루었다. 정해진 틀 내에서 움직이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교육팀의 일들은 모든 업무가 무에서 유를 끌어내야 하는 영역이 대부분이다. 매 교육마다 새로운 기획안이 수립되어야 한다. 여러 부서 사람들과의 소통은 물론이고 교육생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할 일도 많다. 우려스러웠다. 이토록 영역이 다른 일들을 민선이 잘해 낼 수 있을지. 






기우였다. 


민선은 나에게 함께 일하고 싶다고 할 때 다짐했던 말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켜내었다.

업무자료들을 자신의 폴더에 모아두더니 하나씩 뜯어보기 시작했다. 개선이 필요한 점이 발견될 때마다 세세하게 메모까지 해 두었다. 자료 작성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평소 많이 사용하지 않던 파워포인트는 혼자 책을 구입해서 공부하기도 했고 이전에 잘 작성된 자료를 똑같이 만들어 보기도 하였다. 



민선이 자신의 역량을 한껏 발휘하던 때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대규모 신입사원 입문교육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민선은 사내 강사들을 모시고 설명회 시간을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신입사원들의 첫인상인, 회사를 대표하는 각 영역의 강사들이 갖춰야 하는 태도에 대해 한 번 더 당부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한, 강의 장표의 구성과 전달할 메시지 등도 전하길 바랐다. 흔쾌히 동의했다. 필요한 것이었고, 무엇보다 민선의 눈빛에서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설명회가 있던 날,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입문교육 기획안, 교육생들의 리스트, 필기도구까지 모든 것이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잔잔한 음악까지 틀어 놓았다. 회의실로 들어오는 강사들은 철저하게 준비된 자리를 보고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민선의 똑 부러지는 설명이 이어지자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우치는 듯 보였다. 


민선의 활약은 교육장에서 더욱 돋보였다. 

교육이 시작되던 날, 어찌나 연습을 많이 했는지 물 흐르듯 매끄러운 오프닝 멘트를 선보였다. 특유의 기분 좋은 웃음과 말투로 밝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백여 명의 교육생들은 물론 강사, 그리고 운영을 지원하는 직원들까지 하나하나 살뜰히 챙겼다. 강의가 길어져 일정 변경이 필요할 때면 유연하게 대처해 나갔다. 민선의 모습은 마치 한 명의 지휘자 같았다. 자신이 철저하게 계획한 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하고 변화가 있을 때 이를 여유롭게 조율해 가는 교육장의 지휘자. 


이러한 민선의 성과들은 단단한 탑의 돌들처럼 쌓이고 쌓여갔다. 평가 또한 높게 받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제대로 하고자 하는 욕심까지 받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그저 민선이 잘하고 있는 일에 덧붙일 뿐이었다. 


'잘하고 있다.'라고. 



진심이었다. 팀원으로서 일을 잘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힘듦을 일로 극복해 나가는 모습이 대견했다. 물론 한 번씩 무너지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일을 마치고 밤늦게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즈음 공허함이 민선을 짓누르는 듯했다. 할 일이 많지도 않은데 사무실에 홀로 남아있는 모습을 볼 때도 잦았다. 


그럴 때면 조용히 카페에 데려가거나 맥주 한 잔 하며 민선의 말을 듣고 또 들었다. 처음에는 일과 회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러다 최근에 본 영화, 책에 대한 생각을 나누다가 대화가 무르익어 갈 때 즈음 마음속 깊은 감정을 내어놓는다. 

삶의 무게가 버겁다고, 외롭다고, 매일매일 열심히 살고 있긴 한데 또 어둠이 찾아올까 봐 두렵다고 울먹이곤 했다. 어떤 날은 한 시간이 넘도록 우는 민선을 가만히 옆에서 있어준 날도 있었다. 





서로 의지하고 있던 우리



그렇게 민선과 일도 하고 개인적인 감정들도 나누며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민선을 지켜주고 있다고만 여겼었다. 


팀미팅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어려운 프로젝트를 해 내야 한다는 말을 팀원들에게 전해야 하는 자리였다. 회사의 전략에 나의 생각을 덧붙여 의견을 전하는 순간, 낯선 분위기에 멈칫했다. 나는 힘 있게 말을 이어가고 있었고 팀원들은 집중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자신감이 가득 찬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 순간이었다. 



사실, 첫 팀장 역할을 맡으며 큰 실패를 맛보았었다. 

팀장의 역할이 무엇인 지 알지도 못했고 고민조차 하지 않은 채 무작정 승진을 하게 되었다. 한 번도 맡아보지 않았던 직무였기에 자신감도 부족했었다. 팀원들은 경력이 없는 팀장이 왔다며 나를 강하게 거부했고, 일을 추진하는 것은 구멍 난 독에 물을 들이붓듯 힘겹기만 했다. 나는 열심히 일만 하는 팀장이었고 날이 갈수록 자존감까지 떨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민선을 만난 이후 나의 자신감이, 자존감이 치유받고 있었다. 

자주 대화하고 방향을 맞추어 가며 함께 성과를 이루어 간다는 것이 무엇인 지 알게 되었다. 나를 따르는 사람에게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리더십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그때 처음 들었다. 코칭과 조직관리에 대한 책과 영상들을 수시로 찾아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민선과 마주할 때면 자주 듣는 말이 있었다. 


"팀장님,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런 걸 생각하셨어요? 일도 많으신데 어쩜 그렇게 중심을 잡고 해 나가세요? 저도 배우고 싶어요. 저의 팀장님이라서 정말 좋아요." 


아부가 아니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들이었다. 눈빛에서, 목소리에서 진정한 마음이었음을 느낄 있었다. 분명 실수도 있고 부족한 점도 많았을 텐데 좋은 점을 이야기해 주는 모습에 부끄러운 감정까지 든 날도 있었다. 


내가 바라보는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멋진 사람이 아니었다. 평온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마치 내가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리더인 마냥 말을 해주니 정말 그런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멋져지는 것 같았다. 


그때 알았다. 팀장만이 팀원을 리딩하고 성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팀원이 팀장을 더욱 큰 사람으로 자라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돕고 의지하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만의 길을 찾아서


1년 즈음 더 되었을까. 

조직이 불안정해지면서 직원들 직무의 재배치가 진행되었다. 민선의 역량을 높이 산 본부장은 개인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기획팀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불만을 토로하는 민선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타일렀다. 새로운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라고. 민선은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일에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처음 나와 함께 일을 할 때처럼 자료를 모으고 공부해 나갔다. 늘 그래왔듯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민선을 좌절하게 만든 일이 생기고 말았다. 

승진 후보자에서 누락된 것이다. 팀 내에 경력이 더 오래된 직원이 있다는 이유였다. 나의 팀에 있었다면 당연히 후보자로 올라갔을 것이다. 혹여나 연차로 인해 논의 대상이 된다면 직속상사로서 봐왔던 그녀의 성과와 역량, 잠재력까지 어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민선의 팀장은 함께 일한 시간이 짧았고 높이 평가할 수도 없었다. 내가 아무리 설득을 해도 이미 팀 내에 내정된 사람의 순위가 달라지진 않았다. 승진도 운이 따라야 한다는 말이 바로 이런 거였던가.


업무도 잘 맞지 않았다. 숫자 분석과 리포팅을 매월 반복하는 직무였으니, 새롭고 다양한 일을 할 때 더욱 신나 하는 민선에게는 갑갑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니 생기가 사라져 가는 듯 보였다. 주어진 업무만 기계처럼 하는 것 같았다. 억지로 웃는 얼굴, 잦게 내쉬는 한숨을 보며 그녀의 마음이 떠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선이 찾아왔다. 어두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몇 주 전 면접 준비 중이라는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했던 터였다.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나 싶었다.  



"팀장님, 저, 최종면접에 합격했어요."

"아, 그래..?"


"죄송해요."

"미안하긴, 뭐가.."


"저 여기 계속 다니고 싶은데, 팀장님 하고도 같이 있고 싶은데, 회사가 그만 다니라고 하는 것 같아요.."

"..."



붙잡을 수 없었다. 

인재가 회사를 떠나는 것도 아쉬웠고 곁에 두지 못하는 현실에 속상하기까지 했다.  

나를 응원하고 좋아해 주는 사람이 더 이상은 없다는 사실이 가장 슬펐는지도 모르겠다. 




민선이 퇴사하던 날, 참 좋은 꿈을 꾸었다. 

초록색 들판에 파스텔 톤의 화사한 옷을 입은 민선이 서 있었다. 알록달록한 꽃잎들이 그녀의 주변에 하늘하늘 날아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민선은 활짝 웃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행복한 모습으로. 



예지몽이었을까. 

지금 민선은 새로운 회사에서도 보란 듯이 빠르게 적응했고 매니저로 승진까지 했다.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아껴주는 남자와 결혼도 했다. 이제는 홀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따뜻한 보금자리가 생긴 것이다. 






민선이 빛나는 보석이 되어 떠난 지 어느덧 5년이 되었다. 

한 번씩 민선에게서 연락이 온다. 그리고 특유의 해맑은 목소리로 나의 자존감을 높여준다. 


"팀장님, 저는 팀장님하고 일할 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팀장님 같은 분은 못 만날 거예요." 



그럼, 속으로 답한다. 


'나처럼 부족한 사람을 알아봐 준 너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어. 고마워.'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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