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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유 Feb 11. 2024

끝까지 해보고 싶었던 박주임


"1 지망 교육팀, 2 지망 교육팀, 3 지망.. 교육팀이요?"

"네."


"혹시, 다른 곳은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네."


"흠... 회사는 공석이 정해져 있고, 만약 원하는 곳에 배치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니 내일까지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얘기해 줄 수 있어요?"

"네. 알겠습니다."



배치면담표를 바라보았다. 이름 박혜진. K대 교육학 전공. 근무 예정부서 인.사.팀.


똑단발에 굳게 앙 다문 입술, 똘망똘망한 눈빛을 소유한 그녀는 결코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하루라는 시간을 더 준다 한 들 의지가 꺾이지 않을 것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어찌하는가. 그녀가 원하는 교육팀에는 공석이 없는 것을.


회사에서 대규모 공개채용을 진행할 경우 신입생들은 약 한 달간의 연수가 끝날 때 즈음 배치면담이라는 것에 참여한다. 신입생은 자신이 희망하는 부서 3순위를 제출하고 인사에서는 그들의 면접결과, 전공, 교육에 참여하는 태도 등을 관찰한 후 임의로 배치를 해 둔다. 물론, 공석이 있는 팀장들과 사전 논의하여 누구를 받을 지에 대해서도 미리 논의를 한다. 즉, 배치를 거의 마쳐놓은 상태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연수기간 중 혜진에 대해 관찰된 내용을 보았다.

'조원들과의 프로젝트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역량이 탁월해 보임. 역할 분배와 일정 관리에도 많은 기여를 하는 것 같음. 교육팀 근무를 희망하고 있으나, 조원들과의 프로젝트에서 특별히 활발하거나 밝은 모습을 보이지는 않음. 프레젠테이션에 쉽게 나서지 않는 것 같음. 같은 부문인 인사팀 근무 후 교육팀으로 전배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겠음.'


물론 길지 않은 기간이었으나 인사 배치를 오래 경험한 분들의 의견이었기에 어느 정도의 신뢰는 갔었다. 또한 교육부서에서 근무를 하기 위해서는 유연함 또한 중요한 역량 중에 하나인데 내가 관찰한 혜진의 모습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았었다.


다음 날. 혜진을 따로 불러내어 다시 한번 물었다. 그녀는 근무 희망부서에 대한 단호함을 다시 보여주었고, 결국 1, 2, 3지망 모두 교육팀으로 적힌 채 배치면담은 끝을 내었다.






 

"교육팀 박혜진 주임"

인사발령 게시글을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어랏, 분명 공석이 없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가.

채용부서에 가서 물으니, 면접 결과도 좋았고 전공도 교육학이라 어렵게 배치를 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이 원하는 팀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만족하겠구나, 열심히 하겠구나 싶었다.

근무 첫날 내 각 팀마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던 중 혜진은 나에게 유독 밝게 '안녕하세요.'를 외쳤고, 다른 팀으로 더 생각해 보기를 회유했던 나는 괜스레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혜진은 내가 그녀의 의견을 들어주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부문은 같았으나 팀의 위치가 떨어져 있었기에 혜진과 마주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탕비실을 오고 갈 때 복도에서 한 두 번씩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 눈인사만 건넬 뿐이었다.

혜진은 마치 백화점 마네킹에 입혀진 듯 보이는 고급스럽고 산뜻한 색의 투피스 정장을 입고 다녔다. 샤넬 풍의 연분홍색 재킷에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오는 길이의 검은색 치마를 입고 갈색 구두를 또각거리며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훤하다.

 

하지만 그녀의 밝은 색 옷과는 대비되게 얼굴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진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깨는 아래로 쳐져가는 듯했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배치면담을 한 장본인이라서 일까. 괜히 걱정이 되었다. 같은 팀에 있는 다른 분께 물으니, 지금 함께 일하는 매니저가 보통내기가 아니란다. 완벽주의자에 일까지 잘하니 남들이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단다.

이것만이 이니었다. 최근 매니저로 승진하여 일욕심은 하늘을 찌르고 있고, 혜진이 일을 할 때마다 그렇게 잔소리를 해댄다고 했다. 최근 공채 교육에서는 혜진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외부강사 대기실을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가 교육생들이 오고 가는 연수원 복도 중간에서 30분 넘게 훈계를 받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게다가 혜진은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안내하고 설명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 매니저의 높은 눈높이를 맞추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모습까지 보인다고도 했다.

아... 배치면담 때 희망부서를 바꾸도록 더 설득했어야 했나 싶었다. 조금만 더 강하게 얘기했더라면 이 아이의 6개월이 달라졌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만이었다.

헤진과 단 둘이 회의실 안에서 마주한 것은.


내가 여러 직무를 경험하고 팀장이 되어 교육팀에 오게 되는 동안 혜진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주임이 아닌 과장이 되어.


통상 팀장은 팀을 새로 맡으면 팀원들과 일대일 면담을 한다. 맡고 있는 일과 기대하거나 지원이 필요한 점 등을 서로 나누게 되는 자리다.


혜진과 반가운 인사로 면담을 시작했다.

배치면담 때 만났던 이야기를 하다가 그때 바랬던 일들을, 기대했던 업무를 했는지도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어두워져 갔고 그간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초반 2년가량 신입사원 교육을 한 이후로는 제대로 된 교육운영 업무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했다. 계속 다른 교육 담당자를 지원하는 업무를 하거나, 사무 업무만 맡아왔었단다. 이를테면 온라인 교육 운영이나 법정교육의 운영, 교육훈련비 관리 등과 같은 일들이었다.


혜진은 신입사원 교육 당시 만났던 매니저로부터 지속적으로 지적을 받아왔고, 그게 모이고 모여 큰 상처가 되어 자신감마저 떨어뜨리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교육 운영을 하다가 교육생이 사고가 나는 큰 일까지 겪으면서 자신이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까지 생겼단다.


그간 소규모 교육이라도 맡아보려고 노력했으나, 사람들 앞에서 아무리 말을 해 보려고 해도 두근거림과 식은땀이 계속되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교육 전공에 10년 넘게 교육팀에서 일을 해 왔으니 다른 부서에 가서 잘할 용기도 없었다. 새로운 직무를 맡는다 한들 나아지는 것은 없을 것이고 아직 교육이라는 일을 어떻게든 끝까지 해보고 싶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고민스러웠다. 자신감을 어떻게 심어줄지.

그동안 맡고 있던 교육훈련비와 법정교육을 과감히 떼어냈다. 그리고 빈 시간에 교육팀의 본 업무인 운영을 연습할 수 있도록 도왔다. 같은 팀에 있는 차장님에게 혜진이 배울 수 있는 것들을 가르쳐 달라고도 부탁했다. 교육 업무를 계속하고 싶다면 어떻게든 극복하라고 했다. 아니면 이 회사에 있는 한 늘 같은 업무를 하게 될 것이라고, 성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하게 전했다.


혜진은 치열하게 노력했다. 차장님을 자주 찾아가 부족한 것을 스스로 얘기하기도 했고, 연습을 위한 부탁도 지속했다. 아주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잘하게 될 줄 알았다.




어느 날, 혜진이 나에게 찾아와 조용히 말을 건넸다.


"팀장님, 잘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아요..."

"괜찮아, 시간 더 가져도 되니, 조금만 더 노력해 보자."


"극복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과장님, 잘 생각해 봐. 이 회사에 왜 들어왔는지, 왜 교육을 하고 싶었는지, 배치 면담 때 1, 2, 3지망 모두 교육을 하고 싶다 하던 당시 박혜진 주임의 모습을 떠올려봐.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일들이 과장님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가 제일 중요해.."


잠시 정적이 흐른 뒤 혜진은 말을 이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성장하는 게 좋았어요. 그 모습을 보면 저도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질 것 같았고요. 하지만 꼭 앞에 나가서 교육을 운영하는 것 만이 정답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른 분들이 교육을 기획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인 지 찾아보고 뒤에서 지원하는 일을 더 해볼게요."


"... 그럼, 과장님 성과로 보이기가 쉽지 않아. 이곳은 회사야. 내가 아무리 과장님이 지원한 일이라고 얘기해도, 그건 정말 '지원'일뿐이지 과장님의 성과로는 남지 않을 확률이 높아."



"괜찮아요. 그냥, 이 정도로도.... 괜찮아요......"

"....."






면담 이후, 혜진은 정말 다른 파트의 교육 업무를 개선하는데 집중했다. 더 양질의 운영이 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고 담당자에게 전달하였다. 교육과 연계시킬 수 있는 유익한 영상은 물론, 안내문부터 결과보고까지 만들 수 있는 툴이나 사이트도 알아내었다.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인 교육생 피드백 조사 설문 문항도 보다 발전시켜 활용하도록 하였다. 모든 것이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유용한 내용들이었다.


혜진은 한 동안 얼굴에 활기를 띄었다. 자신이 준비한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고, 결국 교육생들에게 유용하게 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처음 우려했던 것과 같이 결국 성과는 교육 담당자에게 돌아갔다. 해가 지날 때마다 늘 같은 업무를 하고 있는 혜진의 고과는 낮게 책정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혜진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잘하고 싶은 욕구는 분명히 있는데 하지 못하는 그 심정은 어떨까.

내가 아무리 잘하고 있다고 말하고, 팀원들이 고맙다고 전해도 회사에서 받는 평가 결과가 주는 타격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회사의 성장이 주춤하고 있으니 구조조정 대상자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도 더했졌을 것이다.



얼마 뒤, 혜진은 나에게 면담을 신청했고, 회사를 떠나겠다고 했다. 이제 그만하겠다고, 교육일이 지않는 것 같다고, 회사에서 할 수 있는 게 더 이상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바닥까지 내려갔다 올라오기 위해 그 누구보다 아등바등 노력했다는 것을, 그 과정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알 있었기 때문이었다.




혜진이 퇴직하던 날, 로비 앞 아이디카드를 찍고 나가 마지막 인사를 하며 안아주었다. 그 어느 때보다 흐느껴 울었던 것 같다. 그저 수고했다, 고생했다, 를 반복하며 등을 토닥일 수밖에 없었다.


10년 전 똘망똘망하고 당찼던 혜진의 자신감이, 교육팀으로 배치받아 신나게 출근하던 표정이 떠올랐다. 교육은 운영하며 힘겨워하고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노력하던 과정들이 스쳤다. 결국 한계를 깨닫고 남들을 도와주며 뿌듯하면서도 씁쓸해하던 모습이 보였다.






얼마 전 혜진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았다.

예쁜 여자 아이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며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평온함이, 행복이 느껴졌다.


얘기를 들어보니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안정적으로 직장을 다닌다고 했다. 어쩌면 혜진은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 먼 길을 돌아간 걸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겪은 10년이라는 세월이 안타깝기도 허무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한 기나긴 여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딱 맞는 옷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애쓰지 않고 찾을 수 있기를 바래고 또 바래본다.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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