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유 Jun 12. 2023

오이 샌드위치가 선물한 뜻밖의 마법

새벽녘 혼자 준비한 나만의 아침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정확히 0.0001초 만에 허리가 180도에서 90도로 접혔다.

새벽의 어스름한 푸른빛 속에 시계가 보여주는 숫자, 5:40. 지각인가. 가만히 앉아 두뇌가 로딩을 마칠 때 까지 기다려 본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고로, 더 자도 된다는 말이다. 대로 다시 누워, 핸드폰을 켜고 카톡, 브런치, 인스타 앱을 차례대로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 그리고 더 이상 볼 게 없어 지루함을 느낄 때 즈음,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자괴감이 밀려왔다. 오랜만에 맞이한 나만의 시간인데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침대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옆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든 두 아이들이 깰까, 슬로우 모션으로 이불을 젖히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다이어리 두 권과 책 두 권을 손에 집어 들었다. 지면에 닿는 발가락을 최소화하여 살금살금 걸어 나와 저소음으로 문을 닫았다. 네 권을 팔에 끼고 나오는 모습을 보며, 나도 참, 제대로 읽지도, 쓰지도 못하면서 맨날 옆에 들고 다니는 너도 참 대-단합니다.라고 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문을 닫는 순간 오른쪽 머리가 찌릿하다. 호르몬에게 곧 지배당할 예정인 것이다. 더 심해지기 전에 약이 필요한데, 속이 뒤집어지지 않으려면 위장을 먼저 채워야 한다.




처음엔 우유에 단백질 파우더나 섞어서 한 잔 먹어야지 했다. 그런데, 우유가 없다. 두유도, 오트밀도, 아무것도 없다. 물에는 타먹기 싫은데. 뭘 먹을까 두 번, 세 번,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해도 적당한 먹을거리가 보이지 않는다. 어제 사 둔 빵이나 한 조각 꾸역꾸역 삼킬까. 어제도 하루 종일 온갖 종류의 글루텐들로 온몸을 가득 채웠는데, 아침까지? 아니 되올시다 이다.


가만 보자. 어제저녁 껍질을 까둔 오이가 있다. 오이 바질 샌드위치를 만들어 볼까.

찬장에서 흰색 동그란 접시를 꺼내어 오이 반 쪽을 올린다. 날이 하얀 세라믹 칼로 오이의 긴 단면을 얇고 넓게 썰어낸다. 아사사삭, 아사사삭, 오이 써는 소리가 이리도 상큼했었던가.

냉장고에서 꺼낸 바질페스토 뚜껑을 조심히 연다. 달그락. 식빵 위에 소스를 엷게 펴 바르고, 오이를 한 겹, 한 겹 올린다. 올리브 오일을 쪼르륵 쪼르륵 지그재그로 엷게 따라준다. 소스 통을 열어 소금과 후추를 차례대로 자자작 뿌린다.

푹신한 흰색 식빵 위의 연두 빛 오이, 그리고 하얗 까맣게 내려앉은 작은 알갱이들, 풀빛 올리브 오일의 반짝임.

예술이다.

띠링, 정수기 버튼을 눌러 온수를 쪼르륵 담고 홍삼 한 포 쪼옥 짜내어 넣는다.


나 홀로 깨어 있는 고요한 새벽에, 나만을 위해 준비한 첫 식사를 만드는 순간들이 모두 새로웠다. 행하는 모든 움직임, 그 움직임에 따라오는 소리들이 온전하게 귀에 들어왔다. 평소에 보던 요리 재료들의 색깔이 더욱 선명한 빛을 띠었다. 콕콕 쪼아대던 두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 느낌을, 이 기억을 글로 남겨두자며, 접시와 컵을 들고 거실 옆 작은 방으로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놓인 아이들 책, 자르다 만 색종이, 연필들을 한 켠에 미뤄두고, 가로세로 70센티 남짓한 공간을 펼쳤다. 노트북을 올리고 숲 속향을 내는 룸 스프레이를 뿌렸다. 향을 깊게 들이쉬며 자리에 앉아 유튜브 루 피아노 음악을 켰다.

이제, 오이 바질 샌드위치를 맛보자.

크게 한 입 베어 물으니, 향긋한 바질 올리브 향, 그리고 알싸한 후추 향이 입안 가득 은은하게 퍼진다, 짭조름함이 옅게 얹어져 맛을 더한다. 아삭한 식감은 더할 나위 없이 상큼하다.


아, 지금 여기, 이 공간, 이 시간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는 느낌, 참으로 오랜만이다. 



벌써 7시다.

두 아이들이 곧 깨어나 저 방 문을 열 것이다. 12시가 되면 현실로 돌아가는 신데렐라의 마음이 되어, 지금 주어진 이 마법 같은 시간을 온전히 진하게 즐겨보자.


책, 그리고 글과 함께.




*시진출처: thing_1022 인스타그램



매거진의 이전글 여보, 그걸 왜 얼굴에 발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