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화해해요, 우리
따뜻한 몸에 심장이 뛴다는 건 이런 거였지.
-드라마 ‘호텔 델루나’ 3화 중
“자,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하세요.”
아빠가 진짜 돌아가셨다. 다시는 만날 수가 없다.
입관을 할 때, 나는 그 사실을 진정으로 느꼈다. ‘관에 시신을 넣는 일’, 그것은 남은 가족들에게 아빠의 얼굴을 보는 것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의미였다.
이별은 이미 끝났는데도 또 다른 의미의 이별이 다시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가 누워있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하지만 차가운 시신으로. 만져볼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물어보고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걸까? 누구에게든 물어보면 “만지지 마세요.”하고 나를 막을 것만 같았다. 아빠 곁으로 다가가서 멍하니 누워있는 아빠를 바라보았다. 그냥 주무시는 것만 같았다.
아빠의 두 발이 하얀 천 밖으로 나와 있었다. 아빠는 당뇨가 다리 감각의 마비로 왔었다. 엄마는 저녁마다 따뜻한 물을 받아서 저 두 발을 주물러 드렸었다. 그 두 발이 보여서 나는 저절로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아빠의 발을 살짝 만져보았다. 용기 있게 쓰다듬거나 잡아볼 수도 없었다. 살짝 만졌는데, 그 발이 너무나 차가워서 나는 부르르 떨었다. 아빠의 발은 딱딱했다. 얼굴도 만져보고 싶었다. 손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살아 계실 때에도 아빠 얼굴을 만져볼 용기가 없었던 나는 이제 마지막인 것을 알면서도 그냥 바라만 보았다.
나는 애교 있는 딸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빠 얼굴을 쓰다듬거나 만져본 기억이 없었다. 지금도 얼굴을 만지면 화를 버럭 내시는 것이 아닐까. 이제 저 얼굴도 다시는 보지 못한다. 지금 봐 두지 않으면 다시 볼 수 없다. 지금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걸까? 나는 지금 마음이 아픈 걸까? 아니다. 그냥 현실 같지 않았다.
‘아빠, 왜 거기 그렇게 누워있는 거야? 아직 다 못 끝낸 말들과 일들이 많은데. 아빠는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미안했다는 말도, 정말 아무 말도 아직 안 해주었잖아.’
아마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목사님이 나를 보시고는 다가오셨다.
“잘 참네. 그렇지만 너무 참지 말고 울어도 돼요.”
아마 다음 순간, 목사님은 후회하셨을 것이다.
나는 진짜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누가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걸 기다렸던 것 같았다. 나 스스로는 울어도 되는지 아닌지도 결정할 수가 없었던 것인지도. 나는 목놓아 울면서 끝까지 우리 아빠를 지켜주었던 의사인 친척 오빠에게 매달렸다.
“오빠가 아직 시간이 더 있다고 했잖아. 적어도 한 달은 더 있다고 했잖아.”
한 달이 더 있었으면 달랐을까?
이게 거짓말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울면서도 내가 우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아빠를 너무 사랑해서? 아니면 내가 아빠한테 너무 잘못해서? 그것도 아니면 아빠가 나한테 잘못한 것들을 사과하지 않아서 억울해서?
외할아버지가 유난히 사랑하고 아꼈던 4살짜리 손주,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안아주면 마법처럼 울음을 그치던 내 아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내가 울면 아이가 겁을 먹을까 봐 참아왔던 눈물을 한 번에 폭발시켜 버렸다. 나는 확인받고 싶었다. 정말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 맞는 것이냐고.
“왜 아빠가 저러고 있는 거예요. 왜!”
엄마랑 눈이 마주쳤을 때 엄마가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보고 계셨다.
“나도 안 울고 참는데 네가 왜 그러니.”
정말 엄마는 울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엄마에게 독하다고도 한다. 그러나 긴 시간 동안 참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어서 또 참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는 남편을 잃었고, 나는 아빠를 잃은 것이니 엄마가 더 슬픈 것이 맞다. 하지만 엄마는 이미 아빠랑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아빠를 이해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아빠와 화해를 하지 못했다.
시간이 없었냐고? 정말 많은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도 시간을 놓쳐버린 것이 안타까웠다. 게다가 아마 더 많은 시간이 주어졌어도 아빠와 화해할 수 없었을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그냥 누워있는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살아있으니까 모든 것을 잊고 그냥 앞으로 마치 아빠가 없었던 것처럼 씩씩하게 살아나가면 되는 것일까? 제일 가까웠던 나의 아빠, 그런데도 가장 미워했었고, 가끔은 원망도 했던 나의 아빠와 화해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떠나보내도 되는 것일까?
시신을 보는 시간은 정말 짧았고 내가 광기에 찬 듯 울부짖었던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이 나를 부축해서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가는데 흐릿하게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교회에서 단체로 손님이 오신 것 같았다. 너무 울어서 힘이 빠진 나는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을 끝낸 듯 기운이 쭉 빠졌다.
그 후의 일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이는 손님들이 많으니 재미있는 듯 사람들 사이에서 귀염을 받고 있었고 손님들이 왔다 갔다 했다. 기독교에서는 향을 피우면 안 된다는데, 다른 분은 향을 꼭 피워야 한다고 하며 언성을 높이셨던 분들도 계셨었다. 또 나는 아들이 아니라서 상주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자식은 나 하나인데 나는 안되고 사위가 남자라 상주 자리에는 남편이 서야 한다는 얘기도 들었던 기억도 흐릿하게 난다. 갑작스러운 부고라 연락을 하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와 준 친구들에게 고마웠던 것도 기억이 난다. ‘앞으로 결혼식은 못가도 장례식은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조각조각 기억이 난다.
아빠는 어깨가 참 넓었다. 아빠와 엄마는 아빠의 병을 안 후부터 장례식도 서로 의논을 하셨었다. 두 분은 모두 돌아가신 후에 화장을 하기로 이야기 끝에 결정하셨었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으시다고 했다. 화장을 하니까 그렇게 좋은 관은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아빠의 어깨가 일반인보다 넓어서 보통의 관에 들어가지 않아서 특수 제작을 해야 한다고 했다.
영정 사진 속의 아빠는 얼굴이 헬쓱했다. 아빠가 아프시고 나서 이미 집에서 나가고 들어오는 것조차 불편해하실 때 즈음 남편의 교회 동생이자 나에게도 친구가 되어주었던 사진사 동이에게 영정 사진은 어떻게 찍는지 가족사진은 어떻게 찍으면 좋을지 물어보았었다. 그 친구는 두 말 않고 카메라를 가지고 집으로 와서 영정 사진과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참 고마운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사진을 찍을 때 이미 아빠는 살이 참 많이 빠져있었다. 한때 살이 너무 쪄서 힘들다고 살을 빼야 한다고 했었던 후덕한 아빠도, 그리고 그 후에 운동을 꾸준히 해서 탄탄하고 당당해 보였던 아빠도 그 사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살이 그렇게 빠졌는데도 남편이 섭외한 네 명의 장정은 관을 메고 비틀거렸다. 아빠가 아니라 관이 무거웠는지도 모르겠다.
아빠를 화장하러 가던 그날은 첫눈이 왔다. 싸리 눈이 휘날렸는데, 그 첫눈이 오는 날 우리는 차를 타고 화장터에 갔고, 아빠는 한 그릇에 담긴 뼛가루가 되었다.
“무거워요? 들어줄까?”
아빠를 다시 모시고 집으로 온 날, 우리 빌라의 경비원 아저씨께서 친절하게 물어보셨다.
나는 조용히 “우리 아빠예요.”라고 말했다. 우리 아빠보다 연세가 많으셨던 경비 아저씨께서는 처음에는 내 말을 이해를 못 하셨다. 아빠가 좀 아프신 줄을 알고 계셨지만 돌아가실 정도인 줄은 모르셨던 것이다.
아빠를 보내드리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와 나는 아이를 키우며 일상생활을 살아냈지만 몸도 마음도 조금씩 야위어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엄마는 아빠 얘기를 하면 더 슬퍼져서 하고 싶지 않아 했고, 나는 생각을 하고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우리는 따로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하나씩 하나씩 기록해 보기로 했다.
‘나는 왜 아빠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었을까? 아빠는 나에게, 나는 아빠에게 왜 그랬을까?’
미치겠는 것은 후회가 너무 많이 밀려온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살아야지. 살아내야지. 후회만 하고 있으면 뭐해. 글로 써버리고 내 마음속에서 사과하고. 지금은 듣지 못해도. 누구나 다 후회해. 시간이 더 있었어도 해. 무한하게 살아야 하면 더 싸웠을걸. 그러니까 화해하자. 살아야 하니까.’
나는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아빠랑 화해해 보자고 결정했다. 아빠는 이제 없지만 내 마음속에서의 이 화해를 이루어 내지 못한다면 나는 앞으로도 누구와도 진정으로 이해하고 화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화해를 해내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