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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애 Jul 19. 2022

함께학교

-함께 했던 기억들

"얘들아, 그래서 뭘 하고 싶다고?"

"7월은 수영장이지."

"지난번에 갔었던 캠핑도 재미있었어."      

"우리, 딱지치기도 하자."

아이들과 어른들의 목소리가 섞여서 여기저기 들린다. 여기는 아이들과 부모들이 뒤엉켜 늘 노는 모임, '함께 학교'의 연간계획 회의 현장이다.   

   


이 모임을 기획한 엄마들은 모두 복지관에서 열렸던 독서에 관련된 강의에서 만났다. 다들 열정이 불타는 눈빛으로 어떻게 하면 내 아이에게 책을 많이 읽힐까 의욕을 불태우게 하는 강의였다. 강의가 끝나고 우리끼리 아이들을 모아서 독서 모임을 진행해보자며 시작된 모임, 그것이 '함께 학교'였다.


막상 엄마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공통된 의견이 아이들은 독서보다 노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하다 보니 어떻게 놀면 잘 노는 것일까로 흘러갔다. 얘기가 엉뚱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함께 학교'는 마을 놀이 공동체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애들을 데리고 격주 토요일마다 모여서 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특성은 각양각색이었다. 승부욕이 강한 아이, 승부욕이 전혀 없는 아이, 운동 못 하는 아이, 내 것이 중요한 아이, 양보할 수 없는 아이 등등. 


처음에 모임이 만들어졌을 때에 윤군은 유치원생이었다. 운동신경이 느려서 친구들이 같은 편으로 뽑아주지 않았었고, 처음에는 많이 속상해했다. 덩치가 큰 고학년 아이들도 있어서 무서워하기도 했다. 나는 애들이랑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고 사람들 만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오랫동안 일도 못 나가고 집에서 육아만 하던 나는 매번 모임에 나가서 뛰어 놀 생각에 좋아했다. 하지만 아이가 싫다는데 어찌하리. 포기를 고민하게 되었었다. 그때였다. 혜성과 같이 윤군 아빠, 즉 나의 남편이 이 모임에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      


당시 나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던 윤군 아빠는 처음에는 이 모임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주말에 집에 늘 오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도 남편에게 모임에 함께 가자고 할 생각도 못했었다.


하지만 연을 만들어서 한강에 가서 날렸던 그날, 그날 우연히 우리와 함께 학교에 함께 갔던 윤군 애비는 갑작스레 모임의 주역이 되었다.      

남편은 만들기를 잘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잘 놀았고 아이들을 좋아했다. 마지막으로 운동을 잘했다. 이 세 가지 조건은 남편이 함께 학교 내부의 우주대스타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자, 거기서 네가 얘를 업고... 그렇지, 이제 던져봐. 와 윶이다."

우리는 명절이 다가오면 아이들이 말로 참여하는 인간 윷놀이를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 고학년부터 유치원생들까지 다양한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큰 애들은 작은 아이들을 업고 안고 말이 되어 게임을 진행했다.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던 아이들은 갑자기 조화를 이루었다.      


겨울에는 연 날리러, 봄에는 나들이를 나갔다. 여름에는 모든 가족들이 한강수영장에 모였고, 복지관에서는 농구, 줄넘기가 진행되었다. 캠핑장에서 아빠들은 고기를 굽고 엄마들은 수박을 잘랐다. 우리는 애나 어른이나 개울에서 개구리 올챙이를 잡다가 모기에게 잔뜩 뜯기기도 했다. 새집을 제작해서 달아주러도 갔었다. 아이들은 새집 다는 데는 관심이 없고 나뭇가지로 칼싸움을 하며 깔깔거렸다.   


여기서 친해진 아이들과 어른들은 동네 친구가 되었다. 엄마들은 급한 일을 부탁하기도 하고, 맛있는 것이 생기면 문고리에 걸어 놓았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서로의 편이 되어주었고 놀이터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함께 놀았다. 어울리기 힘들어했던 아이들은 어느새 든든한 동네 오빠, 형, 언니, 누나 그리고 귀여운 동생들이 되어주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모임이 윤군의 사교성의 기초가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아이는 아빠, 엄마가 모임에서 다른 아이들과 재미있게 노는 것을 무척 기뻐했다. 이 희한한 현상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기랑 노는 게 아니고 남들이랑 노는 데도 윤군은 그 아이들이 재미있어하고 우리랑 친해지면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거참 특이한 취향이었지만, 너만 좋다면야, 윤군. 나는 알아서 놀 수 있었고, 윤군 아빠는 애들이랑 즐겁게 놀고 있었으니까.      


아쉽게도 우리의 '함께 학교'는 코로나가 터지면서 흐지부지 사라지게 되었다. 슬프지만 '모임 금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의 아이들은 많이 자라서 이제 중. 고생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혼자 독박 육아에 외롭고 힘들 때 함께 해준 이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놀아준 덕택에 윤군의 성격을 자신감 있게 만들어준 윤군 아버지에게도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이 모임 없었으면 조기 이혼을 경험할 뻔.     

 

이렇게 '함께 학교'는 우리에게 큰 따스함을 남기고 사라졌다. 언젠가 부활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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