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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애 Jul 16. 2022

낳자마자 샘솟던가요? 사랑이?

-다른 사람의 사랑을 판단하지 말라.

"나는 둘째나 셋째 엄마인 줄 알았지."

조리원에서 나를 호출한 그 조리원의 무슨 담당자라고 했던 여자분이 다짜고짜 내 방을 찾아와서 한 말이다.

"밤에도 호출 안 받고 잔다고 체크했길래."

뭐라고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난처했다.

"보통 첫째 엄마들은 지극정성이쟎아."

"......."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나는 그냥 배시시 웃었다. 싸울 순 없으니까.      


내가 조리원에서 밤에는 젖을 안 먹이고 잔다고 해서 내가 아기를 덜 사랑하는 것이란 말인가. 집에 가면 못 잔다고들해서 조리원에 있을 때라도 사두려고 했는데.

게다가 그게 사랑의 기준이라면 둘째나 셋째는 덜 사랑하는 것이 정상이란 말인가. 이 여자분은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이야기인즉슨 밤에도 콜 받으면 와서 젖먹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이 분이 나한테 와서 아이가 젖을 밤에도 먹으면 아기에게 어떤 면이 더 좋은지 이야기하셨었다면 나의 반발은 이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분이 아이에 대한 나의 애정을 밤중 수유의 여부로 평가할 자격은 없었다.

      


엄마는 아이를 낳으면 무조건 사랑이 샘솟아야 하는가? 내가 아이를 낳았을 때 내가 가장 죄책감을 느꼈던 것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모성애가 적은 걸까라고 느꼈던 것이었다.

열 달을 꼬박 입덧을 하고 무통주사 놓는 의사 선생님이 퇴근하셔서 무통 없이 아이를 낳았다. 매우 고생 끝에 아이를 낳은 것은 나였지만 아이를 낳고 바로 사랑이 샘솟았던 것은 아니었다.


조리원에서 엄마들은 전부 신생아실 옆에 붙어 서서 자신의 아이를 보면서 예뻐서 어쩔 줄 몰랐다.

나의 경우는?

나도 내가 낳은 아이가 신기하고 귀엽긴 했지만 계속 붙어서 보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그 엄마들을 보면서 되뇌었다.

'내가 모성애가 없는 건가?'

그것이 나의 죄책감을 가져왔다. 아이에게 미안해야 하는 걸까?      


조리원에서도 이러했거늘 집에 와서는 오죽할까.

나는 어렵고 힘이 들었다. 나 신세가 어째서 이리되었는가. 남편은 같은 부모인데 나가도 되고, 나는 왜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혔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모성애가 부족한 걸까? 아이가 너무 예뻐서 다 용서된다던데.      


어른들은 네가 뭐가 힘드냐. 어려운 게 뭐가 있냐. 우리 때는 더 힘들었다를 계속 되풀이하셨다.

아니,  그럼 나는 힘들지도 않은데 왜 이러는 걸까.

게다가 어른들 말씀이 젖은 꼭 먹여야 한단다. 그런데 아이는 젖을 안 먹고. 젖은 불어서 아픈데 약은 먹으면 안 된다고 하고.

그래서 나는 점점 우울증에 빠져갔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내가 궁금했던 건. 아이를 낳자마자 목숨을 걸 정도로 모성애가 샘솟는다던데.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지 않던가. 그런데 나는 나의 생명과 나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그럼 나의 사랑이 다른 사람보다 적은 걸까.     



시간이 더 많이 흐르고 내가 우울증을 극복한 후 깨달은 것은 내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과 모양이 다른 것이었다는 것이다.

나의 사랑은 서서히 스며드는 사랑이었다. 아이와 보내는 하루가 또 하루가 쌓이며 내 사랑은 점점 커졌다. 사랑은 다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는가.     


우리 엄마는 나에게 ‘나는 너고, 너는 나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엄마와 나의 관계는 매우 돈독하고 나는 엄마의 말씀을 늘 따르는 딸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때 나는 엄마가 상처받으실 줄 알면서도, “엄마, 엄마는 엄마고, 저는 저예요.”라고 말씀드렸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도 나는 나고, 너는 너라고 말해주곤 한다.

“우리는  정말 좋은 '친구'로 살았으면 좋겠어. 네가 어떤 일이 있어도 네 편을 들어줄 수 있는 친구 말이야. 하나님이 잠시 보내주신 동반자 친구인 거지. 우리 그렇게 평생 잘 지내보자.”

내가 이렇게 말하면 아이가 끄덕거린다.

“누가 너한테 너희 엄마가 너 때문에 뭘 희생했다고 하거든 아니라고 해도 돼. 좀 희생해주는 건 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 내가 좋으려고. 그 일들은 할만하니까 해주는 거지.”

나는 아이가 아기 때 했던 나의 희생은 지나간 것으로 치부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큰 희생은 안 해줄 거야. 네 앞가림은 네가 해야 해. 대신 날 책임지란 얘기는 안 할 거거든.”

이건 남편이 주로 하는 얘기다.



아이가 어렸을 때 교회에 가면,

"아니, 둘째는 왜 안 가죠. 둘째가 첫째한테 얼마나 큰 선물인데."

이 말씀을 계속하시는 어르신이 있었다. 그분은 좀 심했다 싶을 정도로 나와 아이에게 볼 때마다 말씀하셨다.

아니,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그리고 첫째 좋으라고 둘째를 낳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알고 보니 둘째를 나으면 셋째는 언제 갖느냐고 물어보신다고 하니까, 아마 큰 의미를 두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셨나 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이기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은 남의 시선에서 평가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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