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틀어진 관계는 다시 예전으로 돌릴 수 없다.
바다 근처 펜션으로 친구들과 1박 2일 여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우리는 넷이서 신나는 음악을 틀고 한참을 달려 숙소 근처에 도착했다. 저녁에 먹을 고기와 술을 사기 위해 근처 마트에 들렀다.
고기와 술, 사실 이것만 있으면 되지만, 막상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미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는 내 업된 기대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요깃거리가 필요했다.
고기 2kg와 술 여러 병을 샀다. 생수는 기본이고 사이다와 콜라도 필요하다. 햇반과 라면 각 1묶음, 김치를 카트에 담고, 쌈채소와 쌈장, 고기와 같이 구울 새우와 버섯과 파인애플을 담았다. 봉지과자 4개, 치즈, 소시지, 내일 아침 마실 캔커피도 몇 개 사고 나니 카트가 가득 찼다.
계산을 하러 계산대로 향하는데, 아이스크림 냉동고가 보인다. 아, 후식을 미처 생각 못했다, 우리는 각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골랐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숙소 냉장고는 그리 크지 않았고, 냉동 공간은 조그맣게 있었다. 우리는 4개의 아이스크림을 냉동칸에 쑤셔 넣었다.
바다, 사진, 고기, 술, 카드게임, 대화, 그리고 술.
바다는 깨끗했고 날씨도 좋았다. 마트에서 산 고기는 맛있었으며 우리는 2kg이나 되는 고기를 다 먹어치우고는 라면과 과자를 또 먹었다. 성인 남성 10명만 있으면 아마 소 한 마리도 다 먹어 치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술에 취해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춤을 추거나 기억도 잘 안나는 다른 친구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옛 연애 얘기를 꺼내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여행이 끝났다.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우리는 짐을 주섬주섬 정리하다가, 떠날 즈음이 되어서야 냉장고 한 구석에 있던 아이스크림을 발견했다.
그런데 냉동칸이 시원찮았나 보다. 아이스크림들이 모두 흐물흐물 녹아 있었다. 나는 초코맛 콘 아이스크림을 샀었는데, 콘은 종이 포장 안에서 흐물흐물한 형태만 갖추고 있었다.
그래도 먹을 수는 있네 하고 포장을 뜯는데, 아이스크림이 주르르 흘러 손을 다 버렸다. 그래도 고개를 돌려가며 흐르는 아이스크림을 할짝대면서 먹는데, 왠지 내가 평소 맛있게 먹던 그 맛이 나지 않는다. 동네 앞 편의점 냉동실에서 딱 꺼내서 뜯어 이에 사르르 시린감을 주며 달콤함이 입안에 뒤늦게 퍼지는, 그런 즐거움을 기대했건만, 영 기분이 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친구들은 잠들고 나는 혼자 커피를 들이켜 가며 운전을 하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친구는 ‘의리가 있지’ 하면서 결코 잠을 안 자겠다고 천명하더니, 30분을 못 버티고 꿈뻑꿈뻑 졸고 있다. 조수석에서 잠들어도 기분 나빠하지 않을 나를 믿는 거겠지. 그만큼 오래되고 소중한 친구들이다.
나이가 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회사에서 공적으로 만난 사람이든, 썸을 타던 이성이든, 학교에서 친해졌던 친구이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최소한 100명이 넘는 사람들, 많게는 1,000명도 넘는 사람들과 새로운 만남을 겪을 것이다.
만났던 모든 사람들과 100% 좋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수백 명의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과 성격과 상황을 모두 맞추고 기억하며 살아간다는 건, 인간관계에만 올인해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수백 명의 사람들 중 누군가와는 사이가 서먹해지고 멀어지는 경험을 겪게 마련이다. 그것은 오해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우연한 사고로 인한 감정싸움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또는 서로의 성격차이가 누적되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이 지나면서 멀어질 수도 있을 거다.
한번 틀어진 관계는, 다시 예전으로 돌이킬 수 없다. 세상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하듯, 관계는 비가역적이다.
떨어진 접시를 다시 붙여본 들, 처음 만들었을 때의 그 모습일 순 없다. 벽에 긁혀 스크래치가 난 자동차에 아무리 도색을 해도, 새로 산 자동차만 못하다. 한 번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은 아무리 다시 냉동해도 처음 샀을 때의 자태를 회복하기 힘들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던 예전 여자 친구를 떠올린다. 나름 공을 들였던 그녀와의 관계는, 젠가 게임에서 탑이 우르르 무너지듯 격렬한 언쟁 끝에 한순간에 깨졌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다시 만나 묵혀 있던 감정을 풀고 다시 사귀기로 했다. 이별 후의 새로운 만남은 처음처럼 설레지 못했고, 서로를 떠날까 봐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나는 그녀와의 관계에서 금방 피로감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사이에는 거칠게 없다는 깨닫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과거 함께 건물을 지으려던 땅에는 이제 덩그렇게 건물 잔해밖에 남지 않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건물을 디자인하고 설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튼튼한 내진 건물을 지을 구상을 했다.
관계의 재료들을 굳히고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약간의 허풍과 기대심리, 의도한 우연, 둘만의 비밀 등의 기교를 추가했다. 서로에 대한 신뢰, 집착하지 않음, 과거에 대한 의도적 잊음 등의 마인드셋도 준비했다. 이 재료들을 벽돌 사이 시멘트처럼, 촘촘히 우리 사이에 추가해 본다.
관계는 비가역적이다. 그렇기에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무너지지 않도록 천천히 시간을 들여야 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의 관계가 무너질 순 있겠지.
다만 한 번 건물이 무너진 땅에는 과거와 똑같은 건물을 짓지 않으려 한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지금부터 우리가 함께할 나날들은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