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의 힘

관계의 방향성을 +로 바꾸기

by 정이든

이제는 벌써 20여 년이 더 지난 중학교 3학년 시절의 일이다. 처음 새로운 반에 배정받고 새로운 친구와 옆자리 짝이 되었다. 안경을 끼고 피부가 하얗던 그 친구는 조용하고 말이 많지 않은 까칠한 친구였다.


친구는 점심시간에도 혼자 책을 읽거나 학교가 끝나고도 곧장 집에 가기 일쑤였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던 것 같다. 특별히 친한 친구도 없었다. 내 앞가림도 잘 못하는 주제에 나는 보호본능 비슷한 게 일어나, 친구와 친해지려고 몇 차례 시도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친구의 반응은 매번 뜨뜻미지근했다. 특히 자기 책상 너머로 내 물건이 넘어오는 걸 무척 싫어했다. 한 번은 내 책이 자기 자리에 있으니까 "아이씨" 하며 짜증을 내기도 했으니.


며칠이 지나고, 여전히 친구와 서먹했던 어느 날,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은 (무슨 준비물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친구에게 준비물을 빌려달라고 슬쩍 도움을 청했다.


"00야, 나 준비물 좀 빌려줘. 안 가져왔네."

"..."


최대한 웃으며 친한 척 표정을 지었지만 친구는 슬쩍 눈을 흘기더니 내 말을 깔끔히 무시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주제에 준비물을 빌려달라니 싫었나 보다. 별수 없이 다른 친구에게 준비물을 빌렸다. 치사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 얜 워낙 내성적인 친구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런 일이 있고도 난 여전히 그 친구와 친해지고 싶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때가 왔다.


쪽지 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친구가 문제를 풀다가 필통을 뒤지더니 순간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연필로 문제를 풀고 있었는데, 아마 지우개를 안 가져온 듯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슬쩍 지우개를 친구 자리로 넘겨주었다.


친구가 순간 멈칫했다. 한 5초쯤? 가만히 있던 그는 지우개를 들더니 쓱쓱 답안지를 지우고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나에 대한 친구의 태도는 급변했다. 우리와 관계가 중립 또는 적대에서 동맹으로 바뀐 거다. 친구는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시시콜콜한 고민도 내게 털어놓았다. 준비물 때문에 갑질(?)하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1년 동안, 우리는 정말 친한 사이가 되었었다.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연락도 끊긴 친구지만 내가 지우개를 건네던 그 순간의 기억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직 어렸던 내게,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것은 아마도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을 거다.




세상을 살다 보면, 싫은 사람에게 좋은 말, 상대방이 기대하지 못할 행동으로 관계가 회복되거나 좋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상대에게 베푼 작은 친절은 즉시 친절로 되돌아오진 않더라도 나에 대한 상대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는 노력 대비 매우 효과적이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의식적으로 작은 말이나 행동으로 관계의 방향성을 +로 바꾸는데 노력해야 한다. 작은 말과 행동이 표출되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과 시행착오와 결심이 필요하다는 걸 알지만, 작은 변화가 가져다 줄 관계의 변화 폭이 더 클 것이라 한번 기대해보자.


물론 그 반대는 경계해야 한다. 그 반대는 훨씬 쉽고, 효과도 크다. 정말 친하던 사람도 작은 오해와 말 때문에 철천지 원수가 되고 인연을 끊기도 한다.


내 감정이, 생각이 항상 변화하듯,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인식하는 방식도 가변적이다. 우리는 영원한 사랑과 우정을 꿈꾸지만, 언제나 작은 실수로 관계가 망가지곤 한다. 그런 만큼 우리는 충동적인 말과 행동으로 관계를 파탄낼 수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오늘은 조금 소원해진 친구나 가족에게, 평소보다 조금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보는 건 어떨까? 또는 이제 막 친해지는 단계라면, 거창한 칭찬으로 한방을 노리기보다는 사소한 칭찬에서부터 시작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 친구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혹시나 연이 닿아 다시 만난다면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나누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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