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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든 Nov 24. 2024

단편소설 2 : 덕분에

[단편소설 2]

 헤어졌다.


 나이를 먹으며 몇 번의 이별을 경험했다지만, 나영에게 이번 이별은 유독 쓰라리다. 대단한 이유로 헤어진 것이 아니라서 더욱 이별이 실감 나지 않는다. 괜찮아. 1년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지만 인생 전체에서는 짧은 순간인걸, 하고 나영은 생각했다.


 애초에 결혼까지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사이잖아. 그저 내게 잘해줬기 때문에 마음을 열었을 뿐, 확신을 가져본 적은 없다. 그러고 보니 더 열받네, 나 좋다고 따라다닐 때는 언제고. 아이씨.


 돌이켜보면 나영도 잠시 그와의 결혼을 확신한 적이 있다. 생일날 장미가 가득한 꽃다발을 사 왔을 때는 정말이지 이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날 한발 한발 걸음마다 세상에 하나씩 불이 켜지는 느낌이 여전히 생생하다.


 도무지 모르겠다. 연락이 잘 안 된 것이 그렇게 대수인가? 이직한 지 얼마 안 된 여자친구를 응원해주지는 못할 망정, 흥. 연락이 안 되어 서운할 수 있지만 내가 또 연락을 아예 안 한 것도 아닌데. 헤어질 이유까진 아니잖아. 혹시... 다른 여자가 생겼나?'


 목요일 평범한 출근길, 나영은 운 좋게 자리가 난 지하철에 앉아 출근 중이다. 그녀는 이별 관련 릴스를 무심한 표정으로 시청하며, 동시에 또렷한 정신으로 생각에 몰두하고 있다. 가끔씩 위안이 되는 영상들이 그녀의 주의를 빼앗는데, 그러면 그녀는 엄지를 통해 좋아요를 선물하고는 다시 생각에 빠지는 것을 반복한다.


 하긴 애초에 이직은 그의 선택이 아니긴 하다. 나는 이직 후에도 일관성으로 그를 대했어야 했나 보다. 하지만 인생은 계속 변화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왜 서로를 맞춰가지 못했던 걸까.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 우리는 인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맞아. 그냥 인연이 아닌 거다.


 수용과 분노와 체념과 후회 등을 여러 번 거쳐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나영은 오히려 침착해졌다. 마지막으로 본 영상에서 '일단 좀 쉬세요'라는 문구를 기억한 나영은 즉흥적으로 팀장에게 금요일 휴가를 내겠다고 했다. 지난 한 달간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일과 새로운 장소에 떨어져 버텨낸 대가로 소중한 하루의 휴가가 주어진 덕분이다. 아직 휴가를 쓰겠다고 얘기하는 것은 무척 눈치가 보였지만, 일단은 중요한 볼일이 있다는 핑계로 둘러댔다.


*


 그래서 금요일이 되었건만,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나영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서 쇼핑을 하러 갈까, 영화를 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어제 새벽 3시까지 휴대폰을 본 덕분이다. 겨우 옷을 갈아입고 나와 집 앞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라면을 사서 먹는다. 뭔가 절제하는 것이 힘들다. 그래서 그냥 막 떠오르는 대로 먹기로 했다. 이럴 거면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찌그러져 있어야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게 밥을 먹고, 1잔에 2,500원 하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들러서 아이스커피를 마신다. 커피가 너무 쓰다. 대체 무슨 원두를 쓰는 거야. 마시기만 해도 기분이 착 하고 들썩거리는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1인 테이블에 앉아 혼자 유튜브를 보다가, 인스타를 들어가서 헤어진 남자친구의 인스타를 들어가 볼까 하다가 뭐래 하면서 포기한다. 팔로우는 이미 끊은 상태다. 다시 아이디를 검색까지 해가며 그를 찾아가는 수고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나영은 그렇게 2시간을 꼬박 보내다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침대에 누워 멍을 때리다 보니 5시다. 회사에 있었다면 곧 퇴근할 시간이다. 불현듯 나의 소중한 휴가가 이렇게 끝난다는 것이 억울하다. 왜 내가 남자친구까지 잃어가면서 얻은 휴가를 이런 곳에서 날려야 하지? 내일 주말이 오고 여전히 쉴 수 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기에는 너무 오래간만에 얻은 자유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나영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옷을 입었다. 위아래 검은색 운동복을 입고 조깅화를 신는다.


그래, 달리기나 하자. 한강으로 가자.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극복할 수 있다는 증거다.


**


 ... 그렇게 달리기는 개뿔, 나영은 너무 오랜만에 뛰어서인지 그냥 기운이 없는 건지 뭔지 5분도 못 뛰고 지쳐버렸다. 아냐 그냥 걷기라도 하자고 나영은 생각했다. 그저 에너지가 없을 뿐이다. 다시 다음 주부터 회사에 적응하려면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 게다가 밖에 나와서 걷는 것도 운동은 운동이다. 합리화에 성공한 나영의 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어느덧 어스름이 내려온다. 해가 지기 전 한강의 석양은, 짧게나마 현실을 현실이 아닌 것처럼 몽환적으로 비춘다. 우리는 어쩌면 이 찰나의 틈에만 각자의 본모습을 드러내며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복잡한 생각을 잊고 잠시 석양을 마주할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오늘, 이 순간에 뿌려진 석양의 모습은 고유하며, 더 이상 같은 형태로 돌아오지 않는다.


 해가 완전히 지고 밤이 되었다. 나영은 낮에 마신 쓴 커피가 생각났다.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억울하다. 지난번 산책하다 우연히 들렀던 카페가 생각난다. 엄청 기억에 남는 커피는 아니고 조금 외진 곳에 있지만 그래도 프랜차이즈 카페보다는 조금은 특별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집에 가는 길에 커피를 사 가야겠다.


 차분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에 들어선 나영은 카운터 앞에 섰다. 주문을 받는 아르바이트생은 머리를 뒤로 묶고 날카롭게 생긴, 얼핏 보면 여고생으로 보이는 20대 초반 정도의 앳된 얼굴이었는데, 무표정하고 약간의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 주문하시겠어요?

- 네, 따뜻한 라테 한잔 부탁드려요.

- 드시고 가시나요?

-... 네.


 내일이 주말이라는 사실이 퍼뜩 든 나영은 매장에서 커피를 마시고 가는 것으로 급선회했다. 하루에 카페에 두 번 앉아서 목적 없이 시간을 보낸다는 사치도 나름의 힐링 포인트일 것이다. 그런데 웬걸. 주머니에 있어야 할 카드지갑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 아, 지갑이...


 나영의 당황하는 표정에 아르바이트생의 표정에 아주 미묘한 짜증이 번진다. 정말 찰나에 잠시 스쳐가는 미묘한 변화다. 너무 피곤했거나 무언가 다른 언짢은 일이 있었나 보다. 그 변화를 인지한 나영은 더 당황스러워졌다. 지갑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큰 잘못은 아니잖아?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쁠 일인가? 너무한다 너무해.


 계좌이체 같은 건 안되려나? 주인이 아니니까 그런 건 모르겠지. 그냥 다른 카페로 갈까? 그래. 집에 가서 지갑을 가지고 다른 카페로 가자.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 손님? 카드가 없으신가요?

- 아, 네… 카드를 안 가져왔네요. 커피는 다음에 마셔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 네, 알겠습니다.


그 순간,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제가 커피 한 잔 사드릴게요. 괜찮다면.


 갑자기 나타난 경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경수를 바라보다가, 몇 번 거절했다가, 이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커피를 주문했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경수는 나영이 이직한 회사와 같은 계열사에 다니는 직원이었다. 나영은 요즘 너무 정신이 없었는데 오늘 카드도 안 가져온 것 보니 정말 정신줄을 놓고 사는 것 같다는 말을 하며 연신 경수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둘의 대화는 술술 흘러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나영은 커피 값을 꼭 갚고 싶다며 계좌번호를 불러달라고 경수에게 말했다. 하지만 경수는 다음에 커피로 갚아달라며 자기 번호를 불러주었다. 나영은 찡긋 웃는 경수가 능구렁이 같았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카페를 나와 경수와 헤어진 나영은 집으로 향했다. 나영은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커피를 마셔서인지 대화가 즐거워서인지 모르겠다.


 나영의 카드지갑은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식탁 앞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있던 나영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휴대폰을 열어 경수에게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밤 12시까지 이어진 카톡 대화 끝에 둘은 다음 주에 점심을 한번 먹기로 했다.


***


 출근길 '일단 좀 쉬세요' 영상을 본 덕분에 휴가를 낼 수 있었다. 휴가를 낸 덕분에 산책을 나왔고, 그 덕분에 카페에 들렀으며, 지갑을 가져오지 않은 덕분에 경수와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덕분에 나영은 주말 동안 편안한 마음으로 푹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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