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간의 의미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특정 인물, 단체, 국가에 대한 표현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으며, 받아들이기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R의 종말
이 넓은 세상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졌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라던가.
글쎄, 과연 죽어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고작해야 엄청나게 똑똑해 무언가 발견해낸 사람들이나 전 세계를 뒤흔든 유명한 가수들 정도겠지.
이름을 남긴다는 것의 기준은 뭘까. 어딘가에 내 이름이 새겨져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 그거야 누구든 블로그를 운영하고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활동하는 지금 같은 세상에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인플루언서는 SNS에 이름을 남기고, 작가는 책에 이름을 남기고, 과학자나 수학자들은 논문으로 이름을 남기고, 아이돌은 앨범과 음악으로 이름을 남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어딘가에 이름을 남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R이 생각하기에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의 기준은 더 이상 내가 그들의 삶에 관여하지 않더라도 날 기억해 줄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였다.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 죽으면 나머지 구성원들은 그 사람을 평생토록 기억할 것이고, 좋아하던 아이돌이 죽으면 팬들은 그를 그리워할 것이고, 좋아하던 작가가 죽으면 신간을 더 이상 보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
그런 생각을 할 때면 R은 심란함이라는 물살이 거센 계곡에 휩쓸리곤 했다. 과연 죽는다 한들 몇 명이 기억해 줄까. 기껏 해봐야 측근들을 제외하면 몇 명 더 있겠는가. 가족들과 친한 친구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계곡이 들어갔다 나왔다고 찝찝해지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바다처럼 나갔다 나오면 몸에서 느껴지는 소금기와 끈적함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지고 계속 신경 쓰이는 반면 계곡 같은 그 감정은 찝찝함이 적었다.
그 계곡에 들어갔다 나와도 R은 그 희미한 찝찝함을 못 견디고 씻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바쁘기도 했고, 그런 작은 감정까지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기도 했다. R은 단지 아주 조금의 찝찝함과 여운을 남겨둔 채 하루에도 몇 번씩 계곡을 헤엄칠 뿐이었다.
하염없이 계곡에서 수영하다 보니 어느새 바다에 닿은 건 며칠 전이었다.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죽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 것이었다.
R의 하루 일과 중에는 매일 아침 뉴스 기사를 읽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 두 번의 클릭으로 모든 뉴스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치 뉴스이건 엔터뉴스이건 스포츠 뉴스이건 딱히 가리지 않고 읽었다. 제목을 훑고 관심 있는 기사들을 훑었고 늘 새로운 소식들이 R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오늘 뉴스는 전부 똑같은 소식이었기에 제목을 다 훑어볼 필요도 없었다. 오로지 '종말' 소식뿐이었다. 다 비슷비슷한 기사 제목들 속에 R은 가장 눈에 띄는 기사를 클릭했다.
[7일 뒤 인류 종말? 유명 과학자들 모두 똑같이 주장...]
현재 전 세계의 유명한 과학자들이 모두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알려져 큰 화제가 되었다.
7일 뒤에 인류가 종말 하며, 지구에서 딱 인류만이 사라지고 모든 게 남는다는 것이었다.
정확한 시간은...
R이 기사를 다 읽기도 전에 문자 미리 보기들이 시야를 가렸고, 이내 전화가 오며 화면을 아예 가렸다. R은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해숙 씨, 무슨 일이세요?"
R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해숙 씨 (만 나이 54세, 교사였으나 현재 행복한 은퇴생활을 즐기는 중)였다. 해숙 씨는 정말 종말에 아쉬워하고 슬퍼할 사람이었다. 아직 교사를 내려놓고 은퇴한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바쁘게 여행을 다니고 버킷리스트를 다 이루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뭐, 어찌 되었든 지금이 해숙 씨에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 이었다.
R과 해숙 씨는 한때 교사와 학생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데스티니 마냥 잘 맞았다. R이 해숙 씨에게 전화번호를 물어온 건 고등학교 졸업식이었고, R이 졸업 이후에도 늘 연락하며 의지하는 사람도 늘 해숙 씨였다. (가장 처음 술을 함께 마신 사람도 해숙 씨이다.)
"여보세요, 응, R. 종말 소식 들었나?"
"아... 그거요? 네, 들었죠. 선생님은 괜찮으세요?"
"응, 나야 괜찮지.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못한 게 있어 아쉽긴 하네..."
하고 싶었으나 아직 하지 못한 것. 그래, R에게는 그게 있었다.
R이 생각하는 가장 이름을 남기는 좋은 방법은 장기 기증이었다. 적어도 기증받은 사람과 그 가족들은 자신을 기억해 줄 테니까. 기증 희망 등록을 한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아직까지 장기 기증을 하진 않았지만 만약 내가 죽거나 뇌사 상태가 된다면 나의 장기들은 기증이 될 것이다. 그게 누구일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R은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장기기증을 해보고 죽고 싶긴 하였으나 그렇다고 종말 하기 전에 죽거나 뇌사 상태가 될 순 없는 노릇이었다. R은 장기기증 증명서를 만지작거리며 소파에 기댔다. 남을 살리기 위해, 내 이름을 남기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R은 아무리 혼자 고민해 봤자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생각에 R은 검색창을 열었다. 내가 죽지 않고, 내가 다치지 않고 장기 기증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아무리 방법을 찾는다 한들 7일 만에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긴 했다. 뭐,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죽지 않고 장기기증을 하는 방법을 찾는 건 쉬웠다. 검색창에 '장기기증하는 법'만 검색해도 쉽게 나왔다. R은 몇 분 만에 찾아낸 생존 시 장기기증 방법을 오래도록 읽었다. 사람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라 그런지 절차도 많았고 복잡했다. R은 그나마 자신이 O형이라는 점에 안도했다. 다른 혈액형은 같은 혈액형에만 (AB형은 A형, B형에 모두 포함) 기증할 수 있었지만 O형은 모든 혈액형에 기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O형은 O형에게만 기증받을 수 있다.)
R은 장기기증 사이트에 들어가 별로 관심 없는 부분도 읽었다. 어쩌면 조금의 두려움과 막막함을 가라앉히기 위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는 장기기증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애초에 내 장기를 필요한 사람에게 준다는 것이 좋은 일이기는 하였으나, 옳은 일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R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생각을 떨쳐보냈다. 필요한 자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고민할 필요 없이 좋은 일이고, 옳은 일이었다. 잠깐 두려움에 생각이 부정적으로 흘렀을 뿐이다.
R은 똑같은 부분을 읽고 또 읽다가 이내 들어가자마자 나오는 첫 번째 페이지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R이 더 이상 메일 쓰는 것에 지쳐서 그런 건지 원하는 것을 중간중간 물을 수 있어 편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늘 전화를 선호했다.
"네, 안녕하세요. 장기기증운동 본부입니다."
"여보세요, 네. , 지금 장기기증하려고 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