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간의 파병지
절대명령에는 세 가지가 있다.
절대명령 '공격하라' 에는 오로지 전진뿐이고,
절대명령 '방어하라' 에 후퇴란 없다.
절대명령 '대기하라' 에는 어떠한 움직임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게 명령이다.
군인에게 명령이란 생명보다 우선이다.
그것이 너희가 선택한 특전사의 임무이다.
-<태양의 후예> 서대영의 대사 중
100년만에 첫눈이 왔고, 당신도 살아 돌아왔고,
내 평생 행운을 다 써버려서 이제 남은 게 당신밖에 없어.
-<태양의 후예> 윤명주의 대사 중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특정 인물, 단체, 국가에 대한 표현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으며, 받아들이기 불편하실 수 있습니
다.
T의 종말
이 넓은 세상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졌다.
파병지의 아침 6시는 며칠 전과는 다르게 추웠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선풍기 없이는 못 버틸만 크 더웠는데, 이젠 또 찬바람이 불어 긴팔 군복을 입어야 할 만큼 추웠다. 언제 또 이렇게 추워졌지. 파병지에서의 7개월은 끝이 안 보일 만큼 길어 보였는데, 어느새 1개월 남짓의 시간은 남겨두고 있었다. 아무리 파병지라도 6개월간 머물렀더니 정이라도 들었는지 아쉬움이 남았다.
한국에서와의 아침과는 다르게 파병지에서의 아침은 좀 더 상쾌했다. 엎치락뒤치락 예고도 없이 변하는 날씨는 퍽 재미있었고, 계획과 기준 없이 지내는 일상도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파병은 거의 휴가나 다름없었기에 돌아가기 싫기도 했다.
아침에 밖으로 나오자 평소와 다르게 밖은 조금 분주했다. 늦게 일어난 편은 아닌데 일찍 일어난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가 싶었다. 순간 내가 시계를 잘못 봤나, 같은 말도 안 되는 의문도 떠올랐다. T는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오늘 특별한 일정이 있었던가? 아니었다. 그냥 늘 그랬듯 휴가처럼 온 파병지에서의 평범한 하루 중 하루였다.
T가 폰을 꺼내 시간을 재차 확인하려 하자, 확인하지 않고 지나쳤던 수많은 알림 들이 눈에 보였다. 몇 개의 부재중 전화 와, 이곳저곳에서 도착한 몇 백 개의 문자들. T는 문자를 주고받는 걸 좋아했지만 일방적으로 문자를 받는 건 꺼렸기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T는 문자들을 스크롤을 내려 미리 보기로 대충 확인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진 몰라도 안 좋은 분위기였고 사건이 있는 건 분명했다. T는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고 쉼 없이 울려대는 폰을 진정시키기 위해 폰을 무음모드로 바꾸고, 가장 부재중 전화가 많이 쌓인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
"어, 현화. 무슨 일인데? 왜 이렇게 전화 많이 했어?"
이현화. 고등학교 동창이자 최근 가장 믿고 의지하는 친구. 특유의 밝고 긍정적인 성격과 빠른 정보통, 웬만한 데에 다 잘 맞춰주는 성격이 편하게 지내기에 딱 좋았다. 현화는 늘 먼저 전화를 걸고, 먼저 문자를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수시로 연락을 했고, T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을 때나, 군인이 되었을 때처럼 가장 완벽한 순간에 옆에 있었던 것도 현화였다. 현화는 다른 직업을 가졌지만, T가 군인이 된 뒤에는 장난스럽게 T 중위라고 부르곤 했다.
"T 중위님, 왜 이렇게 전화 늦게 받아? 내가 전화 몇 통이나 걸었는지 알아?"
"어, 9통. 5시 20분부터 거의 5분 간격으로 걸었더라."
"넌 또 그걸 다 외우고 있냐. 됐고, 거기 아직 소식 안 퍼졌어?"
"무슨 소식? 아, 사람들 다 시끌벅적하긴 해. 무슨 일인데."
".. 인류 종말 한다잖아, 이번에."
"아직 만우절 아닌데."
"아, 뭐래! 진짜라니까. 7일 뒤에 인류 싹 종말 한대. 딱 '인류' 만."
"..."
처음에 들었을 땐 정말 오늘이 만우절인가 싶었다. 아주 짓궂고 평범한 장난. 하지만 아직 4월 되기엔 한참 남아있었다. 애초에 현화가 이런 시시한 장난을 할 애가 아닌데.
"... 기다려 봐. 기사 내용 캡처해서 보내줄게."
"어, 응."
얼떨결에 전화를 끊었다. 멍하니 서있으니 청아하게 아름다운 하늘이 보였고, 예쁘다, 말고는 딱히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다. 원래도 당황하거나 갑작스러운 일이 닥치면 가만히 서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있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T였다.
1분 채 되지 않아 현화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긴 기사 내용을 그대로 캡처해서 보낸 사진이었다. 길고 읽자마자 글자 울렁증이 생길 것 같은 그 기사는 강렬했고, 부정적이었다. T는 기사를 절반 정도 읽다 말고 손을 떨궜다. 그제야 눈앞의 풍경이 이해가 되었다. 오늘이 남은 7일이었구나.
허무하다고 해야 할지, 어이없다고 해야 할지.
"T 중위님, 지금 파병지 군인들 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비행기 띄운다고 합니다. 가실 거면 짐 챙기셔서..."
"꼭 돌아가야 하나?"
"... 안 돌아가시는 분들도 몇 분 계시긴 합니다."
"..."
돌아갈까. 마지막에 죽을 땐 역시 고향에서 죽는 게 맞나. 고향에 대한 미련이라고는 없는데. 이 파병지를 떠나는 것에 대한 미련이라면 모를까.
"... 안.. 가시게요?"
T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충동적인 행동이었고 무책임한 짓이었다. 돌아가는 게 맞을 텐데. T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네."
T는 폰 전원을 끄고 파병지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 군인을 꿈꾸게 되었더라. 드라마를 보고 군인에 빠져버렸다고 한다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T 가 본 그 드라마 속 군인들은 치열하게 싸웠고, 살아남았고, 눈부시게 빛났고, 찬란하게 사랑했다. T가 원한 게 그 로맨스인지 군인이라는 직업 자체의 멋인지 아니면 군인이라면 있어야 할 것 같은 애국심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T가 원한 군인은, 전쟁 속에 살아남고 또 그 안에서 사랑을 하는 군인이었겠지.
현실이 드라마와 많이 다르다는 건 사관학교에서도 알았다. 드라마처럼 다이내믹하지도 않았고 T에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거나, 그런 건 꿈에도 없었다. T는 간당간당하게 했다. 다들 다 하는 만큼만 했다. 덜도 아니도 더도 아니게. 드라마 속에서 했던 그 아름다운 대사들은 현실에 없었다.
군인이라는 직업은 정말 뭘까. 조국을 위해 청춘과 자기 자신을 바쳐 싸워내는 게 군인일까. 그렇다기에는 T는 전쟁에 나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애국심이 강한 사람들이 하는 것? T는 그다지 나라에 대한 생각은 별로 없었다. 파병지에 오면 여행 온 듯 여기도 나쁘지 않네, 했을 뿐. 드라마에서처럼 군인이라고 전쟁에 나가는 것도 아니었고 전쟁에 나간다 한들 그렇게 화려하고 예쁘게 싸우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모든 군인이 애국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드라마와 현실이 똑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절대명령.'
군인이라는 직업 자체는 T와 정말 맞지 않았다. 그걸 깨달은 건 육군사관학교 1학년 새내기일 때였다. 사실 처음부터 틀어졌다.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일 자체가 T와 맞지 않았다. 애초에 군인을 선택한 이유가 드라마를 보고 멋있어서, 그리고 군대에는 잘생긴 남자가 많을 것 같아서, 그리고 꿈을 이룰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이 나와서, 그뿐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공부를 하면서도 군인이라는 직업은 2순위였다. 굳이 더 좋은 성적이 나왔다면 군인을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신의 뜻이기라도 한지, 내 성적은 딱 육군사관학교에 턱걸이로 입학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육군사관학교에 갔고, 전혀 맞지도 않는 군인이라는 직업을 배웠고 직업군인이 되고 나서는 파병지에서 비둘기나 구경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T가 군인을 포기하지 않은 건 단 하나뿐이었다. 단지 평범하고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군복에 별 하나 달아보는 것. 그게 다였다. 이제 더 이상 다이아 모양은 질려서, 조금이라도 더 특별해 보이는 무늬를 달아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오르면, 그렇게나 안 맞는 명령에 조금이라도 덜 굴복해도 될 것 같아서.
파병지를 걷다 보니 어느새 저번에 딱 한 번 와본 곳에 다다라 있었다. 누가 깎았나, 싶을 정도로 갑자기 훅 파여있는 절벽. 그 아래에는 황무지였다. 아무것도 없는 죽은 땅. 전쟁이 일어난다면 저런 곳에서 일어날까, 상상했다.
날씨가 점차 추워졌고 정말 더 서있으면 남은 7일 감기로 고생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버스럭 거리는 마른 모래들이 조금 새롭게 느껴져서 조금 놀랐다. 왤까- 꼭 마지막이라고 하면 더 애틋하고 더 특별해 보이는 건.
절반쯤 돌아갔을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파병지에서 눈이 온 건 처음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덥더니 날씨가 뒤죽박죽이긴 했다. 솜털 같은 눈은 바닥에 닿자마자 녹았지만 많이 왔다. 아주 오래, 느릿하게. 천천히 바닥에 스며드는 눈송이들이 예뻐서 잠깐 말을 잃었다. 드라마 속에서 그랬나, 100년 만에 오는 눈이라고. 이 눈을 보면 행운을 다 써버린 거라고. 어떡하지, 종말을 견뎌낼 행운이 더 이상 나에겐 남지 않았는데. 그래도 그 드라마에서 그녀가 100년 만에 오는 눈을 보고도 그를 다시 만난 것처럼, 조금 더 행운이 있지 않을까?
종말 7일 전에 새파랗게 예쁜 하늘과 깃털 같은 눈. 어쩌면 그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T는 가만히 서서 눈을 바라보았다. 부질없이 내리고 어딘가에 닿는 것만으로도 사라지는 그 존재가 너무도 하찮았다. 파병지에서 눈이라니, 너무 과분한 아름다움이라고 해야 할까. 정말 종말 7일 전에 행운을 다 쏟아부은 걸까. 하늘 위에 작게 보이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