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간의 영감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특정 인물, 단체, 국가에 대한 표현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으며, 받아들이기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V의 종말
이 넓은 세상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졌다.
이민을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작년이었다.
굳이 한 나라를 정해둔 건 아니었지만 굳이 가야 한다면 아이슬란드로 가고 싶었다. 아이슬란드가 주는 자유의 느낌과 신비로운 자연, 그건 작업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엔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갈 생각이었으나 아이슬란드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가 없었고 이민도 거의 받지 않았다. V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걸 조금 후회했다. 대한민국처럼 여유가 없는 나라도 흔하지 않으니까. 애초부터 여유 있고 자연환경이 풍부한 곳에서 태어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100일, 3개월 1주 정도의 장기 여행을 계획하고 비자를 신청했다. 해외여행을 몇 번 다녀봤지만 이토록 까다로운 건 또 처음이었다. 이것저것 준비해야 될 게 많았고 알아봐야 할 것도 많아서 비행기를 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행기에 타서도 별로 깊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V 보고 늘 감정이 조금 없는 것 같다는 말을 한 건 장난이 아니었다. 그냥 짓궂게 장난을 칠 때도 가끔 있었지만, 주로 다들 걱정 혹은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가볍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넌 감정이 좀 없는 거 같아. 너 자신의 일에도 무심하고, 공감도 못해주고. 아니, 안 하는 건가."
몇 년 전에 만났던 여자친구가 말했다. 짜증이 섞인 얼굴로, 이젠 지쳤다는 듯. 결국 그 여자친구와는 헤어졌지만 V는 딱히 붙잡진 않았다. 그것 때문에 여자친구는 더 짜증을 냈다. 아마 붙잡았다면 잡혔겠지만, V는 아마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붙잡지 않을 것 같다.
경유지로 들렀던 프랑스에는 오래 있지 않았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 이미 여러 번 본 그림들을 한 번 더 보았고, 저번 여행 때 들렀던 가게를 다시 한번 더 방문했다. 프랑스에서는 그게 다였다. 최대한 빨리 아이슬란드로 갈 일정을 짰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무언가를 오래 볼 시간도 없었다.
아이슬란드에 도착했을 때 느낀 점은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늘 차 소리로 시끄럽던 한국과는 달랐다. 확실히 조용했다.
V는 호텔에 100일간 머무를 정도로 돈이 많지도 않고, 그렇게 지낼 생각은 아니었기에 숲 인근의 작은 집을 한 채 빌렸다. 에어비앤비의 형식이었다. 가격이 쌌고 싼 만큼 집이 작고 낡았지만 나름 살아갈 만했다. 다행인 건 인터넷이 된다는 점. 조용하고, 한적하고, 자연이 있는 작업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영감이 떠오르는 곳이었으니까.
V는 작가였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는 건 아니고 시를 썼다. V처럼 감성과는 딴판인 사람이 어찌 시를 쓰겠나, 싶지만 나름 소질이 있었다. V 스스로도 자신의 시를 쓰며 자신이 쓴 것임을 믿지 못하곤 했지만 그래도 V는 나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시인이었다.
시는 소설보다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시라고 하면 조금의 따분함과 예술가들의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말들이 주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비유법이랍시고 빙빙 꼬아 말하는 건 이해하기 어려웠다. V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V는 가벼운 시를 썼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나 실릴 법한 직관적이고 단순한 시들을. 그러면서도 감성적인 어른용 시를. 사람들은 V의 시를 좋아했다. 평론가들은 시가 아니라고 비하했지만 사람에게 꽤 인기를 얻은 뒤엔 그런 얘기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시집을 많이 낸 건 아니었다. 활동이 활발한 편도 아니었고, 상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니었다. 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알 법한 정도였고 호불호도 갈리는 편이었다. 너무 가벼워서 싫다고, 혹은 좋다고. 어차피 다 개인적인 의견 아닌가.
상상처럼 좋은 곳에 있다고 막 영감이 떠오르거나 그러진 않았다. 처음 며칠은 영감이 떠올라 꽤 많은 시를 쓰긴 했지만, 그다지 좋은 작품은 아니었다. 그렇게 타지에서 새로움 속에 생겨난 영감도 어느새 고갈되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던가, 타지에 대한 어색함은 일주일 내로 사라졌고 거리감이 들었던 집도 익숙하기만 했다. 오전의 끝자락에 일어나 창밖을 구경하거나 에세이를 썼고, 시를 읽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은 한국에서와 다를 바 없었다.
아이슬란드에 완전히 적응이 되고 큰 탈 없이 지낸지 90 일하고 조금 더 지났고, 그동안 시집 반 권 분량의 시를 썼다. 오기 전에 쓴 것까지 합치면 딱 한 권 분량이 나왔다. 이때까지 시집은 딱 한 권 밖에 내지 않았는데 90일 만에 이 정도를 쓴 거 보면 확실히 공간의 영향이 있는 것 같긴 했다. 강하게 느낄 정도는 아니더라도 희미한 영향 정도는.
정확히 93일이 지나고, 그날도 매주 구독하는 잡지가 왔었다. V는 잡지의 신문보다 가벼운 느낌을 좋아했다.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신문보다 확실하게 보여주기도 했고. V는 처음부터 영어를 잘한 건 아니었지만 아이슬란드에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어가 늘었다. 처음 잡지를 읽을 때보다는 확실히 늘었다. 아무리 해도 안 늘던 영어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자 금방 늘었다.
주로 연예인 얘기나 정치뉴스 같은 화려하고 시선을 끄는 기사가 차지하는는 잡지 표지 페이지는 정치도, 연예인 얘기 아닌 다른 얘기가 차지했다. 크게 두꺼운 글씨로 적힌 문구, 그리고 길지 않지만 강조되어 있는 기사.
인류의 종말, 7일. 모든 과학자가 입을 모아 말했다는 종말. 언젠간 닥쳐올 거라는 걸 잘 알았지만 애써 부정했던 일들.
방학 숙제를 미루다 보면 방학 마지막 날 몰아서 하게 되어있다. 놀라고 있는 방학에 숙제를 하긴 싫지만, 그렇다고 안 해서 혼나는 건 더 싫어서. 똑같았다. 하기 싫은 걸 미룬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더 싫게 올 뿐이지.
V가 잡지를를 한 장 넘겼지만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중요하다 싶은 내용도 없었다. 종말에 대한 과학자나 역사학자들의 의견, 혹은 반대하는 입장, 사람들의 반응을 담은 인터뷰 등이 담겨있었다. 혹은 종말로 인한 사건사고라거나. 뭐, 딱히 긍정적이거나 좋은 내용은 없었다.
인류의 종말. 언젠가 자기 전 몇 번씩 상상해 본 내용이었다. 세상이 종말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종말이 온다면 스스로가 무엇을 할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어서, 그 순간이 온다면 그땐 알게 될까 싶었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어 매일 스스로를 탐구하고 있는데, 그게 끝날까 싶었다.
하지만 막상 다가오니 해결된 건 없었다.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이런 상황에 하고 싶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 스스로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사이트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을 올리고 싶었다. 답변해 줄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멍하니 현관에 서있던 V는 잡지 가지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밤사이 비가 왔었는지 열어둔 창문 사이로 풀잎 향이 들어왔다. 방금 일어나 이불은 개여져 있지 않았고 어제 입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쳐져 있었다. 노트북은 화면이 켜진 쳐 놓여있었고, 원고를 보낸 출판사의 답장 메일들이 와있었다.
V는 몸을 숙여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거절 메일, 혹은 읽지 않고 복붙해서 보낸 듯한 메일들이 보였다. V는 읽을 생각은 버리고 메일함을 닫았다. 어차피 긍정적인 답변 이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V는 의자에 주저앉듯 털썩 앉았다. 잠을 잘못 잤는지 허리가 아팠고 창문으로 스며드는 풀 내음이 오늘따라 불쾌했다. 창문을 닫으려고 일어나 창가로 향하니 또 나름대로 창밖이 예뻐서 닫기 아쉬웠다. V는 큰 나무와 습지 식물이 자란 숲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를 쓰고 싶다. 문득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보고 있는 모습이 예뻐서 글로 담고 싶다는 생각. V가 노트북을 힐끗 보았다. 지금 당장 쓸 수 있었다. 얼마든지, 마음껏. 하지만 이 생각이 어색해서 당장 의자에 앉을 수가 없었다. 시를 쓴 이후로 이런 생각이 든 적이 몇 번 있었지. 많아봐야 세 번 정도.
V는 의자에 앉았다. 지금 드는 걸 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키보드에 손을 얹었고, 손의 감각이 쓰는 건지 뇌가 쓰는 건지 알기 어려운 느낌으로 시를 썼다. 어쩌면 시보다는 에세이에 가까울지도.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온 글은 글이라고 보기 어려웠지만, 나쁘지 않았다.
몇 분이 흘렀는지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V는 등받이에 몸을 붙였다. 손목이 아팠다. 이렇게 빠른 시간 만에 글을 완성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지? 정말 처음 시를 내고 열광할 때가 아니면 이런 적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쉽게 써져서일까. 이렇게 시가 쉽게 써지니니 뭐랄까, 이제껏 한 편이라도 더 쓰기 위해 밤을 새웠던 노력이 어이없게 느껴졌다. 영감만 있으면 시는 얼마든 쉽게 써지는 거였는데.
영감이라는 건 어디서 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강하게 어떤 감정을 느꼈을 때? 아름다움이라거나, 절망, 슬픔, 혹은 사랑. 그런 것들. 아주 강하게 영향을 끼치는 감정들. 그런 것에서 영감이 나오는 걸까? 그런 거라면 유명한 예술가들은 필시 화려한 삶을 살았던 게 분명했다.
그 이후로도 V는 오래도록 노트북 앞에 앉아있었다. 굳이 무언가를 치지 않아도 그냥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더라도 앉아있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문장들을 바로 적어 내려가기 위해서였다. 종말에 대해 상상하고 있으면 무언가 떠오르곤 했다. 긍정적인 생각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불안함과 안 좋은 상상들 뿐이었지만.
남은 7일은 그렇게 흘렀다. 평소보다 더 오래 그 앞에 앉아있었고 더 오래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하늘이 예뻤다. 주로 멍하니 창밖과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의자에 앉아서 보는 풍경이 제일 예뻤기 때문에 V는 의자에 머물렀다. 노트북은 늘 열어두었지만 키보드에 손을 얹는 일은 드물었다.
V가 시를 한 편 쓰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2주 정도였다. 한 편을 쓰는데 걸리기보다는 영감을 얻는 데 그 정도 걸렸다. 매일 에세이를 쓰긴 했지만 시는 영감 없이는 쓰기 어려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백수 같아 보이기도 했다.
7일 동안 V는 4편의 시를 썼고 8편의 에세이를 썼다. 이틀에 한 번 에세이 한 편을 완성하고 이 주 시 한 편을 완성하는 V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다 좋은 글인 건 아니었지만 일단 썼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V는 공간이나 풍경보다는 충격이 큰 영향을 주는가, 잠깐 고민했다.
이때까지 책을 한 권만 냈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 책이야 인류가 종말해도 세상에 남겠지만 노트북에 주구창창 써놓은 글들은 볼 수 있는 사람도 볼 사람도 없을테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분량이 적더라도 책으로 낼 걸, V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생각했다. 그래도 인류가 종말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구 상에 존재하는 생명이 모두 종말하더라도, 책과 글은 영원히 남아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라도 존재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