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특정 인물, 단체, 국가에 대한 표현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으며, 받아들이기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X의 종말
이 넓은 세상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졌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 말도 안 되는 소식을 어떻게 기사로 써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키보드에 손을 얹었지만 한 글자도 쓸 수가 없었다.
어떻게 써야 조금이라도 덜 충격적이게 느껴지고 긍정적이게 보일까? 애초에 긍정적이지 않은 소식을 긍정적으로 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덜 무거워야 했다. 종말 소식은 그 자체로 너무 무거웠으니까.
X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조약돌 키보드를 툭툭 쳤다. 사무실 안에서 조약돌 키보드를 쓰는 사람은 X 밖에 없었다. 그것도 60만 원짜리, 투명색 조약돌 키보드는 더더욱.
조약돌 키보드는 누를 때 느낌이 좋았고 소리가 토독토독 마음에 들었다. 이때까지 수많은 조약돌 키보드를 걸쳐왔지만, 지금 쓰는 것만큼 좋은 건 없었다. 사무실에서 쓰기에는 소리 때문에 눈치가 보였지만, 다들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으니 소리가 나름 묻혀서 다행이었다.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한 건 키보드 때문이었다.(세상의 악을 알리겠다, 뭐 그런 히어로 같은 생각은 없었다.)
원래 타자 치는 걸 좋아하긴 했다. 키보드 위에서 통통 울리는 느낌이 좋았고 스페이스바를 누를 때 가장 크게 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처음 타자를 배웠을 땐 내가 누르는 대로 쳐지는 것이 신기했다. 타자 치는 게 재미있었지만 칠만한 게 없었고, 그래서 매일 키보드를 두드릴 일이 생기는 직업인 기자를 택했다.
말솜씨가 좋거나 유행에 빠른 것도 아니었다. 말은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썩 유쾌하거나 재미있지는 않았고, 유행에는 늘 쫓아가기 바빴다. 그래도 인터뷰는 적성에 맞았다. 준비해온 질문을 하고 흥미로운 답변을 듣는 게 즐거웠고, 녹음 파일을 들으며 정리하는 것도 타자를 칠 수 있어 좋았다. 살면서 기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살면서 한 일 중에 제일 잘 맞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조약돌 키보드를 앞에 두고서도 아무것도 치지 못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통 좋아하는 키보드에 손을 얹고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한 문장은 적혔다. 인터뷰 녹음 파일을 계속해서 들었고 내용 정리도 했는데 기사는 쓸 수가 없었다.
기자가 된 이후로 부정적이고 무거운 기사를 쓴 적은 거의 없었다. 늘 가볍고 흥미 위주의 기사를 썼고 인터뷰를 하는 일도 적었다. 만나본 건 환경 운동가나 동물 보호단체 대표 정도였다. 어쨌든, 대부분 긍정적인 기사였다는 거였다.
인터뷰도 과학자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책에 나오는 것처럼 과학자들이 고리타분하게 생긴 건 아니었다.) 급하게 발표가 나고 최대한 빨리 인터뷰를 갔지만 이때까지 한 것 중에 질문은 제일 고심해서 준비했는데, 어려운 질문도 1+1을 물은 것 마냥 대답한 건 정말 놀라웠다. 지구의 자전 속도에 태양의 자전 속도를 곱하라고 해도 바로 대답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 종말이 온다면 어떤 느낌일까? 직접 인터뷰를 했고 발표도 들었지만 아직 확신이 안 생겼다. '7일 뒤에 종말 합니다'라고 말하는 걸 옳다구나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 액? 말도 안 되지.'라는 반응일 테니까. 맞다고 수백 번 강조하면 '에이, 설마.' 정도 일 거고.
어떻게 써야 사람들이 종말 소식을 믿으면서도 무겁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X 스스로도 이 소식을 긍정적이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억지로 긍정적인 척 기사를 쓰면 오히려 역효과만 일어날 것 같았다.
키보드에 손을 얹고 가만히 있고 10분 정도 지났나? 온갖 생각에 머리가 잔뜩 뒤죽박죽이 되었을 때 즈음 기사를 쓸 생각이 났다. 수만 가지 생각을 하다가 처음 기사가 되었을 때까지 올라간 덕분이었다.
처음 자리에 앉아 인수인계를 받을 때, 선배가 당부했다.
"사적인 감정은 들어가면 안 돼. 특히 정치, 연예계 문제는. 진실이랑 사람들의 의견만 적어. 진실을 알려주는 게 네 일이니까."
사람들의 의견은 적어도 X의 개인적인 의견은 들어가면 안 된다, 그게 핵심이었다. 거짓을 말하면 안 된다, 한쪽에 치우치면 안 된다 같은 당연한 당부들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거였다. 개인적인 의견을 넣지 말 것.
오랜만에 기사의 본문에 충실해 보기로 했다. 말 그대로 진실만을 적기로. 가장 평범하고 기본이 되는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기사가 너무 지루해져서 쓰지 않았던 방법.
X는 인터뷰를 정리해둔 파일을 열어 한 번 훑어본 뒤, 문장을 수정하고 더 자세한 내용을 덧붙였다. 얼핏 보면 평범한 기사처럼 보였지만 안이 텅 빈 것 같았다. 허전한 기사였다.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는 것처럼.
X는 기사를 몇 번 더 읽으며 고민했다. 어떤 말을 해야 조금이라도 차있는 기사가 될까. 조금이라도 더 따듯한 기사를 쓰고 싶었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까? 같이 종말 하는 주제에. 그래도 7일이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퍽이나, 위로가 될 리가.
X는 멍하니 고민하다가 무의식 속에서 스크롤을 내렸다. 그러다가 문득 눈에 일기예보가 띄었다. 일주일 내내 화창한 해가 떠있는 일기예보. 예쁠 날씨를 예고하고 있었다.
X는 문득 떠올라 기사 마지막 줄에 한 줄 덧붙였다. 기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말을. 그래도 사람들이 아주 작은 위로를 줄 수 있으면 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지 몰라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누군가를 위해서.
7일 동안 날씨가 좋을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