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간의 신기루
<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은 이것저것 감동적인 것 슬픈 것 다 말했다. 어떤 건 가슴 깊이 박혔고 어떤 건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대부분 다 좋았다.
만약 모든 것이 사라져도 그가 남는다면 나는 여전히 살아갈 거야. 하지만 다른 모든 게 남고 그만이 소멸한다면 우주는 아주 낯설어지겠지.
- <폭풍의 언덕> 캐서린의 말 중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특정 인물, 단체, 국가에 대한 표현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으며, 받아들이기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U의 종말
이 넓은 세상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졌다.
옛날 고전이지만, 요즘 로맨스보다 달달하면서도 차갑고 강렬한, 웹 소설 같은 내용의 유명한 명작이 있다. 다들 어릴 때 만화로든 압축된 어린이용 소설로든 읽어봤을, <폭풍의 언덕>. 말괄량이 아가씨 캐서린 언쇼와 거칠고 집착이 강한 히스클리프의 이어지지 않는, 이어질 수 없는 로맨스, 그리고 언쇼 가문과 린튼 가문의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 제목처럼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강렬한 캐릭터들과 몰아치는 사건과 매력 있는 필체는 수많은 사람들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씩 읽어보고, 마음에 품을 정도까지는 아닌 그 소설에 유독 빠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U였다. U가 원래도 강렬한 로맨스를 좋아하긴 했으나, 자기 자신도 교양으로 읽은 고전 문학에 이렇게나 빠져버릴 줄은 몰랐다. U는 금세 언쇼 가문의 사람들에게 빠졌고, 거의 캐서린에 빙의해서 린튼 가문의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헐뜯었고, 히스클리프와 예쁜 들판을 뛰놀았다.
누가 U 같은 사람이 <폭풍의 언덕>에 빠질 줄 예상이나 했을까? U는 소설은 거의 읽지 않고 책이라면 정보를 다루는 책만 읽었다. 소설은 어린애들이나 읽는 거라는 바보 같은 믿음으로. U가 <폭풍의 언덕>을 펼친 이유는 우연히 서점에서 떨어뜨려서 펼쳐본 것뿐이었고, 한 문장 만에 U는 그 책을 샀다. 처음 무슨 내용인가, 싶어 서점에서 한 장 펼쳐보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책을 절반 가까이 읽은 다음 사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 지하철에서 다 읽긴 했지만. 어릴 때 그림체가 예쁜 만화책으로 한 번 읽어본 것 같긴 한데, 이렇게나 내용이 풍부한 책인 줄을 몰랐다.
U는 <폭풍의 언덕>에 푹 빠진 뒤로 심심할 때나 우울할 때나 기쁠 때나 아무렇지도 않을 때나 늘 폭풍의 언덕을 집어 들었고, 열 번 넘게 다 읽은 건 물론 좋아하는 부분은 서른 번이고 넘게 읽었다. 어느새 읽다 보면 다음 대사가 머릿속에서 그려질 수준이었다. 그 정도로 읽으면 지루해질 만도 했는데 다행히 단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
U는 자신의 삶이 <폭풍의 언덕>의 10분의 1만큼이라도 흥미진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U의 삶은 너무 평범했고 하루하루는 지루했다. 매일 저녁 퇴근하고 <폭풍의 언덕> 을 읽는 것 말고는 재미있는 일도 없었다. 이제는 마음에 드는 펜을 샀다거나, 점심 메뉴가 마음에 들었다거나, 웹 소설 이번 편이 유독 재미있었다거나, 즐겨가는 카페 신메뉴가 너무 내 스타일인 것 같은 사소한 걸로는 즐거움을 얻을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 삶에 웃음이 잃어져자고 있다는 걸 뼈 깊이 느꼈다. 지루한 하루하루에 매일 톡톡 튀는 신기루가 되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주 절실하게.
신기루. 홀연히 나타나 짧은 시간 동안 유지되다가 사라지는 아름답고도 기이한 현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U는 전부터 그 말을 좋아했다. 신기루라고 하면 하늘에서 오색빛깔의 얇고 부드러운 꽃잎 같은 조그만 유리조각이 흩날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신기루를 상상할 때면 때론 소나기가 내렸고, 때론 햇빛이 찬란하게 들었다. 행운을 가득 품은 무지갯빛 신기루가 잔잔하게 스며들 듯.
어느 날 고요하던 서점, 신기루를 상상했을 땐 서점의 깨끗하고 넓은 창문 너머로 예쁜 비가 내렸다. 창문에 보석처럼 물방울이 맺혔고, 바닥에 토독토독 소리를 내며 튕겼다. U는 소나기가 그칠 때까지 그 비를 바라보았다. 비가 너무 예쁘게 내려서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U는 그날 하도 읽어 너덜너덜해진 <폭풍의 언덕> 을 한 권 더 사러 간 길이었고, 신기루를 상상했고, 때마침 예쁜 소나기가 내렸다. 사소하지만 좋아하는 것들 뿐이었고, 멍하니 바라볼 정도로 예쁜 날이었다. 행운이 있을 것만 같은 날이었고, 지루하던 U의 인생에 <폭풍의 언덕>의 10분의 1 정도가 스며든 날이었다.
<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은 이것저것 감동적인 것 슬픈 것 다 말했다. 어떤 건 가슴 깊이 박혔고 어떤 건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대부분 다 좋았다.
"만약 모든 것이 사라져도 그가 남는다면 나는 여전히 살아갈 거야. 하지만 다른 모든 게 남고 그만이 소멸한다면 우주는 아주 낯설어지겠지."
캐서린이 말했다. 좋은 말이었다. 캐서린의 수많은 말 중 가장 깊이 남았다. 가장 오래 남았다.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렇게 강해 보이던 캐서린이 저렇게 쉽게 타인에게 흔들릴 수 있다니. 저게 히스클리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사랑했다고 해도 저 정도라니.
지금의 U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은 전혀 아니었다. U는 신기루 같은 남자를 만났고 자기가 생각보다 로맨티시스트라는 걸 깨달았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달달한 로맨스는 진짜 '창작물'이라서 있는 거라고 믿었는데, 마냥 그런 건 아니었다. 신기루 같은 그 남자와의 연애는 <폭풍의 언덕> 만큼이나 강렬했다.
요즘 시대에 서점에서 표지가 예쁜 <폭풍의 언덕> 을 찾고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한국어판 <폭풍의 언덕>과 영어판 <폭풍의 언덕> 을 함께 사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늘 혼자 고전 파트에서 <폭풍의 언덕> 을 고르고 있던 U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폭풍의 언덕>을 고르고 있던 남자는 신기해 보이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요즘 시대에 집에 <폭풍의 언덕> 을 예쁜 표지로 골라서 사두는 경우는 흔하지 않으니까.
U는 자신의 인생이 <폭풍의 언덕> 만큼이나 휘몰아치듯 위험천만하고 화려하고, 또 아름다웠으면 했지만 종말을 바란 건 아니었다. 뭐, 인류의 종말이라니 그것만큼이나 소설 같은 일은 또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누가 종말을 원했을까? 소수의 몇 명이 아닌 이상.
처음 U는 그 사실을 부정했다. 최선을 다해 끝까지 부정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일 거라고. 하지만 결국 인정했다. 때론 인생은 소설만큼이나 비현실적인 법이니까. 또 포기했다. 아주 허탈하게 웃으며 인정을 넘어서 포기했다. 어쩌면 가장 평범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부정, 그다음 인정, 그리고 포기.
"어떻게 할 계획이야? 7일 동안."
남자가 물었다. 통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너무 차분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질문에 대답하기보다는 어떻게 그렇게 평온할 수 있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U는 차마 남자에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원래 대부분의 것에 무던했기 때문이었다.
U는 그 순간에도 <폭풍의 언덕> 을 읽고 있었다. 새로 산 <폭풍의 언덕> 표지에는 빈티지한 갈색에 영어 필기체로 Wuthering Height 적혀있었다. 원서였기 때문에 안에는 영어가 가득했다. U는 애초에 영어를 배울 때부터 <폭풍의 언덕> 원서로 배웠고 읽기 위해 배웠기 때문에 영어엔 능숙했다. 379쪽, 이제 거의 이야기의 막바지였다. 30쪽 정도 남아있었다.
"음..."
U는 고민했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신기루 같은 남자랑 <폭풍의 언덕> 만 빼면 특별할 게 하나 없는 삶이었다. U는 적당한 대답을 고민하며 <폭풍의 언덕>을 한 페이지 넘겼다. 380쪽.
"너랑 놀러 갈 계획이야."
특별할 게 몇 개 없다면, 그 몇 개 없는 걸로 충분히 특별하면 되지 않을까.
"노을이 예쁘고 물이 에메랄드 색인 바다로."
남자는 잠깐 대답이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U는 남자가 급성 심장마비로 쓰러졌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U는 <폭풍의 언덕>을 눈으로 훑으며 빠르게 넘겼다.
"... 빙하가 있다면 더 좋고."
U는 <폭풍의 언덕>을 덮으며 덧붙였다. 책이 가볍게 툭 소리를 냈다.
"... 나쁘지 않네. 딱 좋은 곳이 있어."
"어딘데? 예뻐?"
"어, 엄청 예뻐. 빙하가 있는 바다가 있어."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신나 보여서 U는 안심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농담이라며 웃어넘길지도 모르다고 생각했다. 농담을 수시로 하는 U라면, 늘 웃으며 받아치는 남자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걱정이었다.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그, 오로라가 있는 곳 말이야. 검은 모래 해변이랑 오로라, 얼음 동굴 같은 거."
"멀어?"
"... 조금 많이 멀어. 아마 경유를 해야 할 거야, 프랑스 즈음에서."
나쁘지 않았다. 해변이 있고, 얼음이 있고, 오로라가 있고, 모래가 있을 테니까. 게다가 가장 좋아하는 나라인데다가 가장 자신 있는 언어를 쓰는 프랑스에 경유할 수 있다니 더 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아, 아이슬란드는 조금 추워."
그건 좀 별론데, U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예뻤다. 날씨가 적당히 좋았고, 영화에서 나오듯 새파란 하늘에 구름도 만끽할 수 있었다. 만약 생크림 안에 빠진다면 이런 느낌이겠지, U는 생각했다. 자기도 모르게 위쪽으로 솟은 모양의 새하얀 생크림을 상상했다. 비행기에 타서 U는 남자와 처음 만난 날 샀던 <폭풍의 언덕> 을 읽었다. 원서를 읽으면 멀미를 할까 봐 한국어판으로 읽었다.
아이슬란드의 해변들은 한국의 해변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한국의 해변은 어째서인지 주로 칙칙한 색감이었는데 (여름엔 사람이 많아서 애초에 바다를 즐기기 어려웠다.) 아이슬란드의 해변은 완벽하게 쨍하고 아름다운 푸른색이었다. 보석이란 보석은 다 떼어서 모아둔 것 같은 곳이었다. 크리스털, 아이슬란드 바다의 얼음들은 크리스털 같았다.
U와 신기루 같은 남자는 바람이 차가운 해변가에 앉아 크리스털 같은 얼음덩어리들을 바라보았다. 얼음은 분명 투명하거나 하얀색일 텐데 아이슬란드 바다의 얼음은 푸른빛을 띠었다. 바다가 비쳐서가 아니라 그냥 얼음 자체가 푸른색이었다. 예뻤다. 신기루 조각이 뭉쳐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때, 오길 잘했지? 물에 발을 담그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건 한국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2월 바다에 발 담그는 사람은 없으니까."
"글쎄, 마음만 먹으면 할 수는 있지."
"마음을 먹는 건 어때?"
"..."
U는 남자와 시시한 대화를 이어가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날씨가 꽤 추웠는데도 <겨울 왕국 2>에 나온 것처럼 바다가 얼지는 않았다. 한국이었으면 이 날씨에 강은 충분히 얼었을 텐데, U는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U는 신기루 같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다지 특별하다고 콕 집을 만한 점은 없었다. 그냥 세상에 널리고 널린 남자들 중 한 명. 운명론자인 U는 그 많은 사람들 중 남자를 만난 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찰나의 사랑이라도, 착각인 사랑이라도 딱히 상관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운명의 사랑이라는 게 현실에 있긴 한가?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정도가 아니라면. U는 굳이 운명의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사랑이어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어차피 운명의 사랑이라는 거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으니까. 운명의 사랑이라는 거 시시한 드라마나 소설에나 나오는 거 아닌가? 어차피 운명 같은 건 별로 안 중요하니까. 운명의 남자가 마음에 안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U는 자신의 연애에 관해서 그다지 감성적인 편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연애에는 관심이 많지만 정작 자기 연애는 무심했다. 깊이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도 없었다. 감성 같은 건 정말 별로 생각 없었고. <폭풍의 언덕> 이 소설이라서 가능하지 현실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사랑이라고 믿었다.
U는 남자가 평범한 사람이라서 좋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평범한 사람이라서. 굳이 사소한 기념일 챙기지 않았고 집착하지도 않았다. 부담 없이 만날 수 있어서 좋았고 같이 있어도 긴장하거나 불편한 게 전혀 없어서 편했다. 사람들이 부르는 바로는, 친구 같은 연애, 인가.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꽤 오래 만났고, 예상보다 나쁘지 않았다.
"... 3일 남았네."
종말까지. U는 굳이 그 말을 붙이진 않았지만 남자도 알았다. 굳이 붙일 필요가 없는 말이야, U는 마음속으로 웅얼거렸다. 3일이면 <폭풍의 언덕> 원서를 여유 있게 뜯어보며 읽기에 딱 맞는 기간이지.
"... 아쉬워?"
남자가 물었다. U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아니, 전혀."
"왜?"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봤고, 해야 할 거 다 했잖아."
남자는 U의 말에 잠깐 고민하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폭풍의 언덕> 70번 읽기 못 채우지 않았어?"
U는 남자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비행기에서 읽었어, 마지막 70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