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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떫음 Jul 20. 2022

동굴 가장 깊은 곳으로의 진입

무의식에서 이어진 필름조각들 (5) 이어서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빠는 내가 꿈에 그리던 모습들을 담아주기 시작했다. 마주치는 지인들마다 나를 세워놓으며 자랑을 하셨다. 나를 인정해주셨고, 나보고 천재가 아니냐며 좋아하셨다.

나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친구가 꿔줬던 길몽 얘기도 친척 분들 앞에서 떠들고, 마지막 면접 얘기도 늘어놓고 하며 까불었다. 모든 게 잘 이루어져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은 편하지 못했다.

자그마치 10년을 내가 바라 온 모습이었지만 갑자기 아빠가 그렇게 변하는 게 어색하고 무섭게만 느껴졌다. 나는 아무래도 지난 시간 동안 아빠에게 정이 떨어졌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글이 써지지 않았다. 책도 읽히지 않았다. 뭘 해도 되지가 않았다. 처음으로 슬럼프가 찾아왔다. 대학을 들어가기 전까지 학원을 계속 다녔지만 단 한 번도 과제를 내지 않았다.

선생님께는 논다는 핑계를 대며 수업을 들었다.

수능이 끝나고 한달 정도 지나 같은 동네에 사는 이종사촌친구도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대였다.

그렇게 설날이 되었다.

친지들이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어른들은 합격 얘기를 꺼내셨다.

아빠는 아무래도 잘 모르는 순수예술계통의 대학교는 인 서울에 4년제여도 잘 모르겠던 터였고, 서울대는 그냥 말해도 잘 아는 명문대였으니 부끄러우셨던 것 같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쟤는 공부는 지지리도 안하는데, 운빨로 인 서울은 했다고.

인정받기 위해 10년의 내 노력과 꿈들은 운빨이 되어버렸다.

할머니 댁이었지만 잠깐 산책하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가 친구와 통화하면서 분하다, 그냥 분하다며 울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또 대단한 성과를 하루 빨리 내놓아야만 할 것 같았다.

입학을 앞두고 2월 쯤 되었다.

처음으로 귀신이 보이는 가위에 하루 이틀 연속으로 계속 눌리며 잠을 설쳤다.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글은 여전히 쓸 수 없었다. 이 상태로 학교를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학교 가기가 너무 무서웠다.

피폐해져가던 나는 하루는 학원을 일찍 찾아갔다. 선생님이 일 보러 어딘가로 가셔서 내가 고3때 동안 함께 공부하던 언니가 앉아있었다.

그 언니에게 살며시 가위 눌리는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언니는 한 마디 두 마디씩 나를 복 돋아 주는 말을 해줬다. 비록 1년 정도밖에 보지 않았지만, 이런 내가 봐도 너는 분명히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 누가 하는 말보다도 이 분야에서 오래도록 공부하던 사람한테서 그 한 마디를 듣는데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날 밤은 오랜만에 잠을 편안히 잘 수 있었다.

비록 학교를 가서도 학업에 인간관계에 서울 살이 적응에 감정은 스트레스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3 때 합격하면서 다 끝났다며 무시했던 정체성 혼란이 다시 더 크게 자라 찾아왔다.

그럼 또 열심히 하면 잊혀질 거라 생각했다. 첫 촬영현장을 뛰면서 오만가지 부당한 일을 겪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의지할 곳이 없었고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너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라고 들을 정도로 자존감은 끝없이 바닥나 있었다. 아마도,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다 코로나19 시국이 터지면서 비대면 수업이 병행되고 나는 한동안 본가에서 수업을 들으며 지냈다. 고향이라 믿음직한 친구들도 항상 근처에 있었고, 가족 다 있는 본가에다가 생각이 많으면 내가 제일 잘 아는 산책길을 다니며 마음을 정리하곤 했었다. 모든 것이 방법이 있는 곳이었고 그만큼이나 익숙한 내 도시였다.

그 날이 발화였다. 수업을 끝마치고 어딘가 계속 공허한 감정이 맴돌아 산책하고 오겠다며 밖을 나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공원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내 산책길을 따르는데 점점 감정이 이상해져만 갔다. 왜 이러지, 싶어서 중간에 잠깐 벤치에 앉아 숨을 돌렸다. 그 때 내 근처에 담배를 피려 앉던 한 중년 남성이 나를 훑어보는 것을 인지하면서 덜컥 겁을 먹고는 미친 듯이 달렸다. 다시 내가 안정을 되찾던 산책로를 지나가는데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을 죄 지은 것 마냥 피하려고 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덜덜 떨며 친구한테 아무렇지 않은 척 전화를 했다. 다른 친구랑 있다고 했다. 알겠어, 그냥 산책하다가 생각나서 전화했어, 라고만 답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에, 친구는 장난식으로 한 마디 던졌고 그 때부터였다.

떫음아 무슨 일 있어~?

그 물음에 갑자기 나는 길에 주저앉으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전화 너머로 친구가 당황해서 너 어디야, 나 지금 갈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서 횡설수설 답을 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순간 어질, 하면서 영화 속 장면처럼 내가 보는 세상의 필름이 흐릿하고 흑백인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근처의 인적 드문 공원에서 덜덜 떨며 친구를 기다렸다. 그날이 첫 공황발작이었다.

집보다 바깥도 사람도 그렇게 좋아하던 나는 한동안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대인 기피증이라는 게 생겨버렸다. 매일같이 들르던 산책로, 그리고 가장 믿음직하던 동네에서 벌어진 난생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내 사람들에게 거짓말 하는 걸 싫어했고, 잘하지도 못 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구는 것 자체를 할 수가 없어 모두의 연락을 끊고 지냈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이상한 낌새를 느낀 친구 몇몇이 나를 조심스레 불러 자리를 만들어줬고 나는 그날 아침까지도 친구들에 대한 악몽에까지 시달리다 만나서 울며불며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항상 아낌없이 들어줬지만, 겪어보지도 않은 일에 대해 해줄 수 있는 건 곁에 있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런 나는 감정이 왔다 갔다하고 더더욱 예민해지는 내 자신이 미쳐간다고 생각했고 그게 친구들에게 해가 되고 우울이 전염될까봐 기대는 걸 기피했다.

한 번은 병원을 가봐야 한다는 조언을 얻었었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부담된다는 사실에, 나는 가족에게 이런 얘기를 꺼낸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개념으로 잡혀있었고 그래서 시간이 약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어디서 다가올지 모르는 발작은 예측할 수 없는 만큼 나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지내다 결국 몇 달 뒤 죽을 만큼의 고통으로 나를 찾아왔고 모아둔 세뱃돈을 들고 병원을 향했다.

더 이상 안 될 것 같기도 했고, 대면을 병행하는 수업이 생기면서 서울로 다시 올라갔다.

이미 그 전부터 우울이란 건 내 일상과 다름없이 자리 잡아버려서 아예 이게 나 자체인가, 원래 내 성격인가 뭐가 뭔지 모르겠고, 이따금씩 공황이 터졌다가 사라졌다 반복을 하면 뭐가 나인지 분간이 안가면서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

서울에서 두 번째 병원을 찾아갔던 나는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진단을 들었다.

여러 증상, 병명들이 평균보다 한참 위였다. 전부 심각 수준에 달했다.

우울증, 불안증, 강박증, 공황장애, 수면장애(불면증)...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버텨온 거냐며 물으셨다. 내 상태로 봐서는 그 시간들을 버텼다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하고 병원까지 스스로 발걸음을 향한 것도 엄청난 정신력이라고 말해주셨다. 너무 강한 내 정신력 덕분에 지금 살아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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