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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이령 Oct 21. 2022

우리 썸인가?

달콤한 상상

20대 후반, 새로 취직한 직장에서 나는 그 남자를 알게 됐다. 나보다 3개월 먼저 입사했다는 그는 맑은 목소리에 재치 있는 입담을 가진 밝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남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나의 업무 파트너였지만 경상 지사 소속이었고 나는 수도권 본사 소속이었다. 우리는 매일 수십 통의 업무 전화를 나누며 친해져 갔지만 여전히 서로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나는 오직 목소리만으로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볼 뿐이었다. 고막을 간지럽히는 그의 목소리에 스며들었던 것일까? 언제부턴가 나는 그 사람의 전화를 기다리게 됐다. 나는 그가 좋았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었다. 단지, 좋은 사람에게 느끼는 호감 정도였을 뿐. 그리고 나는 그런 감정이 계속해서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굴도 모르는 파트너 그리고 300km 넘게 떨어져 있는 거리. '사랑에 빠질 조건이 아니잖아?'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의 상상의 호수에는 아주 단단한 벽이 있었고, 나는 그 벽을 점점 더 높이 쌓아 올려만 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출근길,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회사로 향했다. 제법 따스해진 햇살과 버스정류장 주변으로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 꽃이 봄이 왔다는 걸 말해주는 듯했지만 업무에 찌든 나는 봄의 정취를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들어온 사무실에는 처음 보는 직원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선배, 오늘따라 사무실에 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요?"

"이령씨 일찍 출근했네? 오늘 전체회의 날이어서 전 지사 사람들이 다 본사로 올라왔어"


많은 사람이 모인 회사는 도떼기시장처럼 시끌벅적했고, 나는 업무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나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의 업무 파트너인 경상 지사의 그 남자였다.


"이령씨~ A업체건 납기 확인 가능할까요?"

"아! 그거 바로 확인해 드릴게요"

"A업체에서 급하다고 해서, 부탁 좀 드릴게요"


그의 요청을 열심히 처리하던 와중에 전화기 속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엇? 안녕하세요. 본사 오셨으면 저한테 와서 물어보시지 전화는 왜 하셨어요?"

"그게..이령씨 자리를 몰라서 전화했어요"

"A업체건은 패킹 실려서 차주 화요일 입고 예정이에요"

"아! 감사합니다"


그게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매일 업무 통화를 하는 사이였지만, 얼굴을 본 게 처음이어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어색한 기류가 흘렀고 그런 상황이 민망했던 나는 딱 일 이야기만 하고 그에게 선을 그어버렸다.


**

우리가 실제로 만난 그날 이후로 그는 나에게 더 살갑게 굴기 시작했다. 내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날이면 그는 꼭 최화정 성대모사를 하고는 했다. "안녕하세요~ 최~화정이에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성대모사를 들을 때면 나는 항상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더 친해져 갔고, 나의 상상의 호수에 있던 단단한 벽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벽을 완전히 허물게 한 그 사건이 일어났다.


내가 근무하던 회사는 개인폰 번호를 거래처에 공개하지 않는 곳이었다. 외근이 잦았던 그 남자는 법인 업무폰을 사용하였고, 나는 내근직이었기에 개인 내선전화만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 남자가 내 개인폰으로 카카오톡을 보냈다.


< 제품 너무 무거워요ㅠㅠ >


이 카카오톡을 본 순간 내 상상의 호수가 이 남자로 가득 차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겠지만 나는 '이 사람 날 좋아하나?'라는 생각을 필두로 '장거리 연애를 하는 나', '결혼한다고 직장에 사표를 내는 나', '경상도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나'까지 미래에 대한 온갖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고백을 받고 그걸 거절하는 상황을 상상해보며 대사를 미리 생각해보기까지 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에 대한 갖은 상상들이 나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업무 얘기로 시작한 카카오톡은 사적인 이야기로 바뀌어갔다. 맛집, 운동, 아재 개그 이야기 등을 하며 우리의 대화는 퇴근 시간 이후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게 썸인가 싶어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나는 그에게 초강수를 띄웠다.


< 저한테 개인폰 번호 알려주시면 안 돼요? >


그랬다. 그 남자는 법인 업무폰으로 나와 카카오톡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의 개인폰 번호가 궁금했던 것이었다.


< 회사에 제 개인폰 번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이령씨한테만 알려드리기 좀 곤란하네요 >


그에게 매몰찬 거절을 당한 나는 지금까지 해왔던 갖은 상상들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졌다. 나는 담담하게 < 그럼 어쩔 수 없죠~ > 란 답장을 보내고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튕기는 건가?', '밀당을 하는 건가?' 별의별 상상이 또다시 나를 뒤덮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남자는 다음날 나에게 카카오톡을 하지 않았다.




사랑과 관련된 상상은 달콤하면서도 참 씁쓸하다. 썸 단계의 상상은 너무나도 달콤해서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지만, 짝사랑 단계의 상상은 써도 너무 쓰다. 다행히도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았던 그 남자는 사실 나를 좋아하는 게 맞았다. 폰 번호를 알려주는 것이 곤란하다던 그는 며칠 뒤 나에게 개인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은근슬쩍 본인의 번호를 알려준 것이다. 그는 나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밀당의 고수였고, 나는 그에게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요즘도 그 남자와 관련된 상상을 많이 한다. 함께 여행을 가는 상상, 아이를 낳는 상상, 노인이 되어 오순도순 사는 상상, 나는 앞으로도 이 달콤하면서 행복한 상상들을 계속해서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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