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편의 소설을 회고록이나 자서전과 분간 못할 정도의 맹추는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다. 나 역시, 어쭙잖긴 해도 명색 소설가가 아닌가. 하지만 작품과 삶이 일치하는 부분을 만날 때 독자들은 당연히 흥미를 느낀다. 작가는 물론 자신의 삶을 사실 그대로 배끼지는 않는다. 그러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럴 수도 없다. … 사실 그대로 쓴다고? 누가 그럴 수 있을까? 기억되거나 말해진 사실은 결국 발췌된 사실일 뿐이다. 선택과 배제를 통해 ‘사실’이 구성된다. 거기에 굴절과 왜곡이 끼어든다. 그것이 작품이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사실, 또는 사실이라고 말해지는 것에 대한 미신이 있다. 어떤 작가가 쓴 소설이 사실이라고 하면 구미가 당긴다. 심지어는 소설가가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사실을 썼다고 믿고 싶어하거나 사실을 썼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한다. 우리는 그다지 치밀하지 않고 현명하지도 않다. 사실을 썼다고 하더라도 소설가가 쓴 것은 결국 소설이다. 백 퍼센트 증류 상태의 사실이란 없다. 더구나 소설 속으로 들어오면 더욱 없다. 그런데도 사실, 또는 사실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우리를 홀린다. 사실에 대한 우리의 신봉은 소설을 작가의 삶과 겹쳐서 읽게 한다.
작가는 자신의 삶의 의식, 무의식의 다양한 파편들을 조작함으로써 소설들을 만든다. 삶의 파편들은 때로 소설의 겉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고, 더 자주는 눈에 잘 띄지 않게 숨어 있기도 한다. 삶이 없으면 소설도 없다. 따라서 소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파편들 속에 감추어둔 작가의 내밀한 음성이지 파편들을 꿰맞춘 사실의 복원이 아니다. 그러나 독자는 책 밖에 있고, 작가가 쓴 글들은 책 속에 갇혀 있다. 독자는 작가를 만나기 위해 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독자는 한 작가가 써놓은 소설들을 읽음으로써, 그 각각의 소설들에 드러나 있거나 감춰져 있는 파편들을 찾아내어 자기의 경험과 상상력에 의존하여 조합함으로써 나름대로 한 작가를 만든다.
-이승우 <생의 이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