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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 Apr 14. 2020

비와 사슴


회색 숲 속에서 사슴이 밟은 자리에 꽃과 풀이 발목까지 자라났다가 발이 떨어지면 시든다. 오늘도 혼자 사뿐사뿐 걸어가는 사슴. 내리는 비를 뿔로 받아낸다. 뭘 찾는 거니? 나무가 물었다. 호수를 찾고 있어. 지금까지 마주쳤던 친구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걷는 중에 사슴을 사랑하는 비가 말을 걸었다.


비는 사슴을 적시고 사슴이 밟은 땅을 적시고 사슴이 자라게 한 노란 꽃과 풀을 적시고 사슴이 시들게 한 꽃과 풀도 적신다. 숲은 푹 젖어 사람들은 검정 우산으로 눈을 가리고 다닌다. 입술과 턱만 내민 까만 사람들이 사슴을 지나쳐 간다. 검정 우산들은 사슴을 할퀴고 지나간다. 왜 하필 나야? 사슴이 비에게 물었다. 지구엔 다른 사슴도 있고 토끼도 있고 곰도 있고 소나무도 있는데 왜 하필 나를 사랑해? 비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비는 사슴의 할퀴어진 자국에 가만히 앉았다 떨어졌다. 비는 별로 말이 많지 않다. 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비가 내려 질척한 땅 때문에 걷기가 힘들어졌다. 결국 사슴은 비에 발이 묶여 울었다.


호수를 찾는 사슴에게 찾아온 비는 사슴에게 여러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비가 본 것들, 비가 경험한 일들, 비가 만난 사람들, 비가 좋아했던 사람들, 비가 사랑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사슴은 가만히 들으면서 걸었다. 비는 종종 찾아와서 사슴을 괴롭게 하거나 황홀하게 했다.


잠시 쉬었다 갈 겸 서울에 들렀다. 자주 가던 중고서점에 들어가 책을 샀다. 새로 발견한 제과점에서 쿠키도 샀다. 사슴은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하늘엔 먼지가 가득했다. 입을 하얀 마스크로 가린 사람들이 눈만 내놓고 사슴을 노려보거나 유혹했다. 사슴은 그들과 어울리면서 호수 비슷한 것들을 보았다. 호수인줄 알았는데 얕은 웅덩이였고 호수인줄 알았는데 시끄러운 조명이었고 호수인줄 알았는데 큰 거울이었다. 사슴은 슬퍼졌다.


오랜 시간을 서울에서 보낸 탓에 사슴은 숲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어 버리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사슴은 서울에서 호수를 찾기 위해 혼자 아스팔트길을 걸었다. 사슴은 딱딱한 길을 너무 많이 걸은 나머지 발이 부르텄다. 아스팔트는 사슴이 밟아도 꽃과 풀이 자라지 않았다. 대신 발에서 흐르는 피가 길에 묻어 단풍처럼 발자국이 생겨났다. 먼지 때문에 사슴의 입술이 말라갔다. 사슴이 숲을 떠난 이후로 오랬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사람들은 가뭄에 시달렸다. 서울은 사포처럼 까끌까끌해졌다.


비가 너무 보고 싶어서 사슴은 기우제를 지내는 무당에게 찾아갔다. 도시의 변두리 큰 은행나무 밑에 무당의 집이 있었다. 제물로 네 다리들을 바치면 비를 내려줄게. 사슴은 알겠다고 했다. 다리가 사라지자 가슴과 배가 땅에 털썩 닿았다. 꼼짝 할 수 없는 사슴 위로 다시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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