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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I Oct 15. 2023

기억할만한 지나침

가을날, 중고서점에서

주말근무를 자청해놓고 짐만 덜렁, 흔적도 없이 바깥으로 튕겨져 나간다. 지난 2주간의 쏘다님이 흐린 날 달빛처럼 희미해져 간다. 발길 닿는대로 걷다가 중고서점에 들어간다. 책에 많은 돈과 에너지를 할애하지 않겠다는 몸부림이다. 책을 좋아하지만 책 그 자체를 좋아하는, 책을 읽는 행위는 무척이나 귀찮아 하는 그런 사람. 언제부터인가 속독이 습관이 되어 문장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읽는 게 고통스러워졌다. 무엇이든 빨리, 남들보다 먼저 그 의미를 해석하고 파악하느라 문장 안의 깊이는 감히 헤아리지도 못한다. 그렇게 얕은 얼굴을 하고는 또다시 서점을 들어오다니. 염치가 없다.


자연스레 발길이 가는  시집과 에세이 코너다. '글자가 많지 않아서' 라고 얘기하면, 너무 솔직한건가. 정말 그렇기도 하고, 사실  안되는 글자를 읽다가 심장 얻어맞은 느낌을 경험한 적이 몇번 있어서  뒤로는 시에 대한 애정이 부쩍 늘었다. 에세이나 소설, 수많은 자기계발서를 둘러보다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졌다.  피곤이 몰려온다.  표지에 혹해서 구입했다가 내용을 읽고 단숨에 덮어버린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유명인의 추천이나 검색된 책들로 덜컥 온라인 주문을 했다가 낭패를   한두번이 아니다.  이해하지도 못할 내용, 온갖 어려운 단어와 문장들을 잡탕처럼 집어넣은 책도 많다. 호기심을 끌만한 제목과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포장한 책들은 일단 제껴둔다. 흔히 ' 팔리는 '이라고 보이는 곳에 세워둔 책들은 몸에  좋은 사탕더미같다.   좋은데 막상 와서 읽어보면 이건 아니다 싶다. 찝찝하다. 그래서 작가라는 직업이 정말 렵다. 오로지  자체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신이 주신 선물이 아닐까.


끌리는 책들을 집었다 놨다, 이게 먹을거리였으면 단번에 욕지거리 먹었을 행동을 수십번 한다. 내지 몇장 읽어보고는 바로 덮어버렸다. 책 취향에 있어서는 판단이 빠르다. 애매하다 싶을 때는 한참을 서서 고민하다가 결국 내려놓는 경우가 많다. 시집 코너를 한참 둘러보다가 발행된지 오래되어 구석에 꽂혀있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제목은 무척이나 익숙한

<최영미 시집 -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 독한 한 줄에 온갖 패러디들이 쏟아지고, 광고 카피니 뭐니 수많은 컨텐츠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정작 이 시집을 읽어보지 못한 나의 무지함을 반성하며, 책을 집어들었다. 그녀의 솔직하면서도 대담한 글을 읽다보니 어쩐지 속이 시원했다. 나와 너무 다른 시대를 살았던 그녀이지만, 생각하는 것은 비슷하구나 싶다.


지난주, 서울에서 같이 사진을 배웠던, 친구이자 나이 많은 인생 선배인 '이' 선생님을 만나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바다 사진을 찍는 게 참 좋다는 말을 하며, 나에게 책 한 권을 추천했다. <모든 삶은 흐른다> 책 표지 색이 차분한 와인색이라 마음에 들었다. 내용은 읽지도 않고서 '책 너무 좋을 것 같아요' 라는 속에도 없는 말을 했다. 인문학이나 철학 쪽은 잘 들여다보지 않는데, 그냥 책 표지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그리고 추천한 데는 어쩐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 덥석 집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사무실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모든 삶은 흐른다> 첫 부분을 꼼꼼히 읽어보다가 어느새 뒷부분까지 후루룩 빠르게 둘러보고는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천천히 읽었다. 책이 정말 마음에 들었을 때 나오는 행동이다. 쓸데없이 문장이 화려하지 않고, 쓸데없이 에피소드가 구체적이지 않고, 인문철학답게 모든 것을 아름답고 부드럽게 써내려갔다. 정말 물 흐르듯이- 바다에 대한 모든 것, 바다에 대해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바다와 인생에 대해 논했다. '내가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가 이런거였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바다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창밖을 보니 은행나무가 벌써 노랗다. 지난주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시간이 너무 빠른 건 아닌가' 그러다 문득, 이 좋은 계절이 또 지나면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숨막히는 답답함과 막막함에, 아직 오지도 않은 겨울의 한기를 몸서리치게 느낀다. 나중에 또 읽어야지 휘적휘적 책을 보다가 다시 꽂아놓고는 일에 집중하려 애를 써본다.


집에 오는 길에는 '기형도 전집'을 샀다. 한번씩 바람이 불면 책을 후루룩 사곤 하는데, 요즘이 그런 때다.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면, 어쩐지 책을 사야만 할 것 같은 서점 귀신에 홀리는 걸까. 충동적으로 구입한 책들은 다시 책장에 들어가 한동안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요즘 새로 발간된 책들은 정이 가질 않는다. 오래된 조금은 묵은 향기가 나는 기형도 시인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 아껴서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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