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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감감무 Mar 16. 2022

설국 - 가와바타 야스나리

사람마다 그 계절하면 떠올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봄이면 석촌호수. 여름에는 괴짜 가족과 페일에일 맥주. 가을에는 슬램덩크가 생각난다. 그리고 겨울은 어린 시절 동생과 눈사람을 만들던 기억과 가평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함박눈이 내리던 어느 날. 추위도 모르고 가로등 불빛이 물든 주황빛 눈을 가지고선 하얀 눈사람을 신나게 만들었다. 잘생김보단 예쁨이 어울리던 동생은 햇살처럼 따뜻하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지금은 누구보다도 여름이 어울리는 상남자 헬스 트레이너가 됐다.

가평에서 군 생활을 했다. 군 생활 한 곳으론 오줌도 안눈다고 한다. 난 아니다. 물론 군 생활은 지옥이었지만 가평의 겨울을 가까이서 보고 느낄 수 있는 점은 좋았다.

가평의 겨울은 넓게 온다. 눈이 한번 내리면 온 시야가 하얗게 물든다. 쌓인 눈에 햇빛이 반사되어 더욱 찬란해진다. 백발의 노인같이 머리에 눈을 덮은 나무들이 고고하게 숲과 산을 메운다. 멀리서 바라본 겨울은 그렇다. 그러나 가까이 가면 잔혹하기 그지없는 게 가평의 겨울이기도 하다. 온도계가 깨질 정도의 측정불가한 추위와 쓸어도 곧장 원래보다 더 쌓이는 눈. 동상에 걸린 선임의 힘겨워하는 모습. 얼어버린 치약 등이 그렇다. 아름다움과 잔혹함을 겸비한 가평의 겨울이 내겐 두 번째 겨울이다.

그리고 내게 겨울의 키워드가 하나 추가된듯하다. 너무 유명해서 안 읽은 게 민망했던 책 설국이다. 솔직히 읽는 동안 지루해서 여러 번 책을 덮었다. 시골 겨울의 고즈넉한 정경의 묘사가 아름답긴 한데 너무 많아서 힘들었다. 흐름의 세부적인 전개가 불친절해 읽기 힘들었다. 쓰다 만 느낌이 자꾸 들었다. 겨울 정경의 묘사에만 열심히인 느낌마저 들었다. 대충 읽어서 그랬다.

책이 재미없는 거라며 투덜대곤 잘 읽지 않고 있던 와중이었다. 요즘 직장 후배가 실수가 잦다. 문제가 생기면 남 탓하지 말고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란 말을 건넸다. 퇴근 후 쉬면서 유튜브를 보는데 던져놨던 설국이 눈에 들어왔다. 나부터 실천하자 싶어 집중해서 책을 마저 읽어봤다.

머릿속에 영상을 그리듯 읽어나갔다. 여관방의 인테리어부터 주인공이 자주 내려다보곤 하던 창문 밖의 비탈길, 시골 겨울의 고즈넉한 풍경, 마을의 모습, 나에게 온몸을 내던지는 열정적인 여성의 눈빛, 마음이 가지만 다가가기 힘든 또 다른 이성 등등을 영상화하며 읽어나가니 한결 수월해졌다. 자극적인 것에 중독된 나머지 평온함을 즐기며 감상하는 태도가 사라진 게 문제였다.

천하태평하고 허무주의적인 주인공의 성격에 공감이 갔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니 헛수고다, 떠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헛수고라는 말을 뱉으며 무심한 태도를 일관하던 그의 내면을 읽어나가는 것은 거울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 그에게 상처받으면서도 온몸을 내던져 그를 사랑하는 마코에게선 그리운 누군가가 떠올랐다.

온갖 자극에 중독된 현시대의 사람(나를 포함)이 읽기에는 다소 심심할 수 있다. 그러나 다 읽고 나면 이만큼 계절과 사랑의 냄새가 농축된 책을 만나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나의 겨울은 이제 동생, 가평, 설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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