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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필명 Aug 25. 2021

그들만의 리그

league of legend

위기를 기회로!


PPT 화면에 띄워진 파이팅 넘치는 문구가 무색하게 회의실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삼백시 관광과의 조 과장은 대신기획의 제안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마침내 적당한 단어를 찾아낸 듯 입을 열었다.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아이디어에 근본이 없어요, 근본이.


삼백시는 <2021 코로나 팬데믹 극복을 위한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의 일환으로 관광지 개발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대신기획의 ‘삼백시 탄광 인프라를 재활용한 대규모 테마파크 조성 및 콘텐츠 산업과의 제휴’ 라는 아이디어는 경쟁입찰 때부터 여러 직원들의 호평을 받아왔지만, 이번 사업의 키맨인 조 과장을 설득시키는 일만큼은 쉽지 않았다. 대신기획의 입장에서, 200억 규모의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조 과장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관광이 무슨 뜻인지는 다들 알고 있죠? 볼 관에 빛날 광. 반짝반짝 빛나는 볼거리가 있어야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거죠.  MZ세대는 SNS에 공유할 게 없으면 그 근처에 가지도 않아요.

    -예, 그래서 저희 제안은 삼백시의 탄광 인프라를 최대한 살려서…

    -아니, 박 프로. 요즘 젊은 사람들이 탄광 같은 거 궁금해 하겠어요? 그런 자잘한 거 말고 큰 게 빠졌잖아요 큰 게…


박 프로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과장의 눈치를 보던 담당관이 입 모양으로 넌지시 힌트를 줬다. 두 글자에 모음이 ‘ㅗ’와 ‘ㅏ’라는 것까지는 확실했지만 자음은 분명하지 않았다. 확신이 없던 박 프로는 가장 말이 되는 답을 뱉어보기로 했다.


    -동상이요?

    -그래요~ 해외 유명 관광지들, 아니 포항에 호미곶만 봐도 손바닥이 떡 하고 버티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거 아닙니까. 박 프로는 우리 삼백시의 명물하면 떠오르는 게 뭐예요?


‘탄광도시’라는 단어가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박 프로는 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 과장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송이…버섯이요?

    -이제 말이 좀 통하네. 그런게 하나 서 있으면 ‘있어빌리티’ 하고, 인증샷 찍기도 얼마나 좋아요.

    -아… 그러면 테마파크 앞에… 송이버섯 동상을 크게…


담당관은 자신의 힌트를 알아챈 박 프로에게 칭찬의 의미로 찡긋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는 과장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검정색 인조가죽으로 덮인 사무용 노트에 ‘송이버섯, 크게’라고 적고 동그라미를 쳤다.


    -볼거리 다음은 놀거리가 필요한데… 박 프로가 제안한 탄광체험 이런 건 좀 뻔하지 않겠어요? 좀 더 익스트림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게 필요한데…

    -번지점프나 집 라인 이런건 어떨까요? 요즘 유행이던데. 우리 애들도 참 좋아하더라구요. 헤헤헤.


담당관은 넋이 나간 박 프로를 대신해 수줍게 아이디어를 냈다. 이번 사업을 통해 과장에게 점수를 따고 싶은 욕망도 조금 섞여있었다.


    -그거 좋은데요? 타고 내려 와서 인증샷 찍을 수 있게 포토존도 준비해봐요. 왜 그런거 있잖아요. 입간판에 구멍 뚫어놓고 얼굴만 빼꼼 내밀고 사진 찍는 거...

    -네네, 이해 했습니다. 하나는 광부, 하나는 송이버섯 이렇게 준비할까요?

    -그건 뭐, 담당관 님이 박 프로랑 논의 해주세요.


자신의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진 것이 뿌듯했는지, 담당관은 ‘포토존-광부1, 송이버섯1’을 노트에 적고, 특별히 동그라미를 두 번씩 쳤다. 박 프로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먹거리가 중요한데… 박 프로 쪽에서 제안한 게 뭐 있었죠?

    -송이버섯 전골이랑 버섯 탕수입니다.

    -약해요 약해. 특색 있고 ‘있어빌리티’ 한 길거리 음식이 있어야 해요. 예를 들면 송이버섯 빵 같은 거 좋잖아요? 웰빙 느낌도 나고, 들고 다니면서 먹을 수도 있고

    -모양도 송이버섯 모양으로 하면 예쁘겠네요.

    -담당관 님,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요. 그리고 송이버섯 빵이 당연히 송이버섯 모양이지 무슨 모양입니까? 왜 하나마나한 말로 흐름을 끊어요. 거 참.

    -죄송합니다…


괜한 얘기를 꺼내 점수를 잃은 것 같았는지 담당관은 금세 풀이 죽었다. 아까보단 확연히 의욕이 떨어진 모습으로, 노트 위에 송이버섯 빵을 그리고 있었다.


    -아무튼, 뭐 이 정도면 젊은이들이 좋아하지 않겠어요? 박 프로 생각은 어때요?

    -예… 뭐… 좋네요.

    -놀고, 먹고, 보고 완벽한 삼박자입니다, 과장님

    -잠깐, 그걸 슬로건으로 썼으면 좋겠는데…


담당관의 대답에 조 과장의 눈이 번뜩였다. 집중력을 잃었던 박 프로는 ‘슬로건’이라는 단어에 화들짝 놀라 물었다.


    -예? 어떤 걸...

    -놀고, 먹고, 보고, 쓰리고!


회의실 곳곳에선 박수가 터져나왔다. 담당관은 좀 전에 잃은 점수를 만회할 심산으로 가장 격렬하고 부산스럽게 박수를 쳤다. 과장이 박수를 끊지 않았으면 거의 휘파람을 불 기세였다.


    -삼백시에 가면 쓰리고가 있다, 이런 식으로 홍보하면 딱 맞아 떨어지지 않겠어요? 아이디어 다 나왔네. 우리 박 프로가 해야될 일을 내가 다 해버려서 어쩌나 이거. 하하하하.

    -아하하… 아닙니다, 과장님. 그럼 잘 준비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아무튼 다음주 시장님 보고까지 열심히 달려봅시다. 고! 고! 고! 쓰리고!



<그들만의 리그> 21.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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