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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Nov 12. 2021

백김치를 보내며

 “옆에 있을 때 잘해줄걸.”

 “돈 있을 때 베풀며 살걸.”

 “젊었을 때 하고 싶은 거 다 해볼걸.”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서야 후회하는 것들이 참 많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잘하고 살라는 조언을 어른들로부터 귀가 아프게 듣고도 꿈쩍 않다가 결국 뒤늦게 후회하는 우(愚)를 범하고 산다. 심지어 번쩍 하고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그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할 때가 있다. 내 발등 내가 찍고서야 ‘아, 내 발등!’ 하는 격이다.


  평소에 했어야 하는 일들이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필요한 게 있는지,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먹고 싶은 것이 있는지 챙겼어야 했다. 콕 집어 이야기를 듣고서야 움직이고 보니 엎드려 절 받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하고 어색하다.

 

  언니의 방사선 치료는 모레부터였다. 한 달 전쯤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해 정밀검사를 받고 6주간의 방사선 치료를 위해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시작 날짜를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암이 제법 진행된 상태라 수술 전 방사선 치료를 먼저 해야 한다는 진단이었다. 일이 있다는 핑계로 부산에 내려가 보지도 못한 채 시간만 갔더랬다. 병명과 암 진행 정도를 확인하고 간 사람은 치료 전까지 하루가 1년처럼 길고도 초조했겠지만 한 다리 건너라고 처 삼촌댁 벌초하듯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친정엄마와 언니 동생이 같은 아파트에 무리를 이루어 사는 데다 곁에 가족들이 있으니 살뜰히 잘 챙겨주리라 여긴 것이다. 그래서 적잖이 안심도 되었다. 설명은 좀 구차하지만 누군가는 도움을 주겠지 하고 미루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나마 간간히 전화해서 잘 있느냐고, 잘 먹어야 한다고 말은 번드르르하게 했었다. 엄마에게 언니 보양식 해줄 때 보태라고 돈 몇 푼도 보냈다. 어떨 땐 전화할까 하다 매번 같은 말도 지겹겠다 싶어 힘내라고 톡만 달랑 보내기도 했다. 수술하기 위해 서울 올라오면 그때 챙겨주면 되지... 하며 편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치료를 시작하기 전, 힘내시라 응원하기 위해 전화를 했다. 기쁘게도 치료가 하루 앞당겨져 내일부터 시작한단다. 항상 씩씩하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반복하는 언니. 치료 날짜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보다 치료를 시작하게 되어 오히려 기쁘다는 언니. 나을 거라는 생각, 좋아질 거라는 생각만 하면 힘이 난다는 언니다. 언니는 항상 이랬다. 엄살도 통 부릴 줄 모르는 천상 맏이다. 이럴 땐, 잘될 거라고 기도나 해달라고 말해주었으면 참 좋겠다.


  한참을 통화한 끝에,

“... 옆에 있으면 맛있는 것도 좀 해주고 할 텐데, 영 미안하네.”라고 말했다.

“그래? 잘됐네. 백김치 좀 해서 보내라, 음식 잘하잖아... 김치로 상 받은 사람이 그것도 못할까...”

기다렸다는 듯 속사포 랩을 구사한다.

 “김치를 담가 상을 받은 게 아니라 글을 써서 받은 거라니까. 뭐라하노?” 나는 살짝 꽁무니를 뺐다.

 막상 김치를 담가 보내려고 생각하니 뭐라도 해주겠다 처음 가졌던 측은지심은 사라지고 귀찮은 생각만 드는 거다. 사람이 이렇게나 간사한 것이다.

먹고 싶은  말하라 한다고 그걸 진짜로 말을  하냐?  3 엄만데? 시중에 나오는 가공김치도 너무 맛있구먼, 시켜 먹지...’ 속에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거나 그거나 같은 거지. 할 때 파프리카도 넣고 배도 좀 썰어 넣고, 부추가 암에 좋다네, 그것도 좀 넣고... 국물은 많이 필요 없다. 맛있게 해서 좀  보내봐라...”

역시 시키는 게 익숙한 선생이다. 입만 가지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지시사항이 꽤 많다.

“알았다. 쪼매만 해서 우선 보내볼게. 백김치는 전공이 아니라서 맛있게 되려나 모르겠다. 김장할 때 다시 좀 더해서 보내던지, 동치미도 좀 해서 보내던지 할게...”


배추 3포기를 밤새 소금에 절이고 새벽에 한 번 뒤집고 아침에 씻어 물기를 빼놓았다(좌), 백김치의 소(우)

  그제야 통화를 끝내고 나니 ‘예나 지금이나 이놈의 행동파 기질은 바뀌지도 않았나’ 싶다.

예전에도 그랬다. 절대 안 하겠다 생각했던 것도 옆에서 옆구리 살살 긁고 부추기며 칭찬하는 ‘마의 3단계’를 통과하지 못하고 분연히 일어나 실행 내지 행동하고야 마는 성미 말이다.

낚였다, 당했다고 생각되는 이 분위기는 뭐지?

 

  맞다, 옆에 있을 때 잘해야 하는 거다. 할 수 있을 때 하는 거다. 필요하다고 할 때 해줘야 하는 거다. 나중에 후회할 일은 만들지 않아야 하는 거다.



  마트에 가서 배추 3포기, 무 1개, 쪽파, 부추, 파프리카, 양파, 마늘, 생강 등 재료를 사 오고 김장용 비닐백, 스티로폼 박스도 구해왔다. 그리고는 밤새 절인 배추를 뒤집고 헹궈 물기를 빼서 엎어놓고 출근을 했다. 오후에 퇴근을 해서 찹쌀풀을 쑤고, 사과와 양파, 젓갈을 함께 갈아 강보에 싸 짜내고, 채 썬 야채와 버무려 소를 만들어 백김치를 완성했다. 마지막으로 배도 한 개 썰어 넣고 슴덩슴덩 썬 무와 남은 쪽파를 중간중간에 박아 넣었다. 포장 완성!

내일 아침 우체국에 들러 택배를 보내면 되리라.

 

  백김치를 앞에 두고 행여 부담될까 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에 적어본다.

사람 인 자가 생겨 먹은 모양이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것이랍디다. 힘들 땐 힘들다, 아플 땐 아프다 말하며 서로 기대어 살아갑시다. 혼자서 해낸 일도 가만 따지고 보면 저 혼자서만 한 게 아닙디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고 손길이 스친 것이고 마음이라도 보태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더이다.

고통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도 힘들지만 고통의 바깥을 서성이는 사람들도 힘들기는 매한가지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최소한 식구들의 걱정과 배려는 호의적으로 받아줬으면 좋겠고 때론 이용 내지는 활용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S.O.S 를 하란 말이오. ‘백김치 좀 해줘’ 했듯이 말이오.
 “됐다, 내가 알아서 한다, 신경 쓰지 마라.” 매몰차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반드시 완치가 될 것이니 믿음을 가지고 마음 편히 생각하고 잘 먹읍시다, 알았지요?

   

  이 아침, 식탁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백김치가 담긴 박스를 바라보며 생각는다.

 ‘남의 일 같지 않다.’는 탄식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구나. 나의 일, 내 가족의 일이 될 수도 있구나.

참, 기 막힌 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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