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1년 365일 중 360일은 술과 함께 였다고 기억한다. 물론 사람과 함께 였다. 안타깝지만 5일 정도를 뺀 이유는 피치 못할 사정 몇 개쯤 있지 않았을까 하는 어림짐작이다.
1월에는 희망 품은 ‘신년주’, 2월에는 위풍당당 ‘졸업 축하주’, 3월에는 대학 새내기 ‘환영주’, 4월에는 주민등록증 받고 ‘성인주’, 5월부터는 ‘시대주’의 시작이었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놀았다는, 달을 노래한 ‘달타령’과 이 ‘술타령’은 맥을 같이 한다. 이유와 핑계를 앞세워 ‘술 푸는 사회를 만들자’는 의기투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 푸는 사회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의문이 일까?
매일이 축제 같을 줄 알았던 87년이었다.
그 해의 시작은 바람처럼 희망차지 않았다. 비명 같은 뉴스 한 꼭지가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시작을 준비하는 사람들 마음은 기대와 흥분으로 벅찼을 것이고 대학 새내기 마음은 호기심 천국이었을 것인데...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한 청년이 ‘탁’ 치니 ‘억’하고 죽은 것은 1월이었고 4월 13일 호헌선언은 민주화 염원에 찬물을 끼얹었다. 학교는 들끓었고 학생들은 분노했다. 체육대회 우승 트로피에 채운 막걸리를 돌려 마시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지 며칠 후의 일이다. 폭풍 전야의 고요가 찾아왔다.
학교는 술 푸는 사회가 되어 갔다.
어디 학교뿐이었을까? 상처를준사람은아무렇지도않은데아픈건우리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밤이 많아졌다. 교실에 있어야 할 학생들은 삼삼오오 학과 방, 잔디밭, 빈 교실에 모여 회의와 토론을 했고 답답한 마음으로 일부는 술집으로 기어 들어가 목소리를 높여 울분을 토했다. 막걸리만 마셔댔다. 막걸리가 탈출구였다. 막걸리에 노가리, 막걸리에 깍두기, 막걸리에 소주를 말아 또 노가리.
비쩍 말라비틀어진 노가리에 애꿎은 화풀이를 했다.
꼿꼿하기 그지없는 노가리의 대가리를 분지르고 옆구리를 갈라 굵은 가시를 뜯어내고 쫙쫙 살을 찢어발겼다. 발라낸 뼈까지 천천히 오도독 오도독.
노가리와의 되치기 한 판을 하고 나면 막걸리는 시원했다.
왜 하필 막걸리였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 평생 마실 막걸리를 그 해에 9할은 마신 것 같다. 가방만 들고 학생증이 있다 뿐이지 그때 우리는 학생이 아니었다. 오전에 겨우 수업을 하다가도 오후에는 시위대의 북소리와 외침이 파다했다. 수업이 미루어졌고 중간고사도 치지 못했다. 5월,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 의해 사건의 은폐 축소 전말이 저녁뉴스로 전국에 알려졌다.
오전 수업도 제쳤다. 수업을 듣는 일이 죄를 짓는 것 같았다. 시위대에 참여했다가도 최루탄이 터지면 뒤로 내뺐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뭣도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죄책감을 수업을 듣지 않는 무언의 시위로 상쇄하려 했다.
그런 날은, 학교 벽에 붙은 대자보가 만장(輓章)처럼 휘날렸다.
최루탄이 일상이 되었다.
전경을 향해 던지는 화염병은 정당한가? 참여하지 않는 지성을 지성이라 할 수 있는가? 학생의 본분을 지키는 게 맞는가? 학내 시위만으로도 이 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는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는가?
수업은 잊고 아침부터 술집에 앉았다.
아침부터 먹는 술이니 술이 밥이어야 했고 술이 술이어야 했다. 그래서 막걸리였다.
고민과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질수록 빈 막걸리 통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났다.
‘막걸리’라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미운 나의 초상(肖像)이었다.
우려와 걱정이 현실로 나타난 6월 9일,
사달이 났다. 또 한 청년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6월 10일 범국민대회가 시작되었다. 들불은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학생은 학교를 떠나 거리로 거리로 몰려나갔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호헌 철폐, 독재 타도!”
버스와 택시가 바리케이드를 쳐서 시위대를 보호했고 행주대첩 돌무더기는 주먹밥이 되어 돌아왔다. 시민들은 박수와 환호로 응원가를 대신했다.
역사를 바꾸는 건 한 명의 위인이 아니라 다수의 민중이다.
시위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치열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시대의 아픔을, 절실한 요구를, 간곡한 외침을, 의롭게 미쳐 가는 것을, 받아들이자 했다. 앞장서자 했다.
마지막이다, 꼭 한 번은 마주하고 돌아서야 할 나의 초상이다.
마지막이라 다짐했던 그날은,
이상한 일요일이었다. 아침부터 공기가 달랐다.
까마귀 소리를 들은 것도 아닌데 불안과 공포가 오돌토돌 소름처럼 일어났다. 집에 있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연산로터리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연산로터리 밖에 못갑니데이, 오늘 거기서 모인다 아입니꺼, 내도 마, 소리 함 꽉 질러뿔라꼬, 답답해서 살 수가 있시야지, 몬 살겠다, 고마...”
‘네, 아저씨, 저도 오늘은 미치려고요, 못살겠어요’
로터리는 물론 여섯 갈래 길까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서면로터리와 시청 앞은 이 보다 더할 터인데, 언니는 시청 앞으로 간다 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소리마저 멈추었다. 다른 주파수의 함성소리라 듣지 못하는 것이었다.
페퍼포그에서 불이 일고 최루탄이 함박눈처럼 날아왔다. 흩어진 지랄탄 하나가 나를 따라왔다. 전경이었는지, 백골단이었는지, 그들도 뛰어왔다. 방향을 찾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내 팔을 어느 기공소 사장님이 끌어당겼다. 대오는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했다. 희생만 쌓일 육탄전이다. 또 나갈 것인가? 물러날 것인가?
“마이 다칬네, 고마 학생은 집으로 가래이, 여는 우리가 안 있나, 조심하고” *
왼팔과 무릎에서 피가 계속해서 흘렀다. 다시 합류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흐르는 피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아저씨의 끝 말이 내 뒤통수를 때렸다.
“여는 우리가 안 있나, 조심하고”
‘죄송해요, 거기 없어서, 죄송해요, 집으로 돌아와서’
그날 밤 언니는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가톨릭센터에 모여있다 했다.
내 청년이 한심해서 술만 마셨다.
그날 밤, 꺼이꺼이 울며 울며 막걸리에 내 정신을 맡겼다. 할머니도 엄마도 동생도 잠이 들었는데, 까만 밤을 하얀 막걸리로 채웠다. 그런다고 여기 있는 것이, 다쳤다는 핑계로 집으로 돌아온 것이 설명이 될까? 그래서 울었다.
술에 취해 울었고 슬퍼서 울었다. 막걸리가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내 청년이 한심해서 술만 마셨다.
아침이었다.
1987년 6월 29일이었다.
*) ‘많이 다쳤으니 집으로 돌아가라, 여기는 우리가 있으니(지킬 것이니)...조심해라!’ 의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