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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Nov 03. 2020

배추도사 무도사는 옳다

찬비 내리는 날, 배춧국과 무채 전은 진리다.

  간 밤에 비가 내렸나 보다.

거실 커튼을 열자 눈에 들어온 가을은 흠뻑 젖어있었다. 바스러질 듯 말라 뒹굴던 소란한 낙엽들이 일제히 숨을 죽인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을 지나 가을은 깊어가는 중이었다. 찬비는 잠시 멈추어 있으나 뒤이은 바람의 행차에 아슬하게 달려있던 잎들이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져 포복(匍匐)한다. 계절에 순응하는 자연의 자세는 낮고도 무겁다. 엄숙하고도 경건하다.


  거실 창문을 열어 본다. 공기 냄새가 궁금했다.

차가운 공기가 훅~포위망을 뚫고 기습을 감행해 들어왔다. 잠들어 있던 거실의 따뜻한 공기는 손 쓸 틈 없이 끌려 나갔다. 거실은 금세 무장해제되고 만다.

“후~ 하~” 뜨거운 입김 역시 찬 공기에 닿자마자 부서지는 포말처럼 흩어져 자취도 없이 사라져 갔다.

‘차가운 가을이다’ 뒤로 물러서며 창문을 닫았다.


  ‘오호~라, 여행 간 남정네들, 고생 좀 하겠는데...’

잔뜩 찌푸린 회색 하늘과 냉랭히 부유하는 물 입자들의 군무(群舞) 속에서 몸은 알아서 움츠러든다.


  이른 아침, ‘창 밖의 여자’가 아닌 ‘창 안의 여자’가 되어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며 비 오는 가을날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은 남편과 아들의 부재 때문이다. 고기 구워 먹으러 1박 2일 여행을 갔다.(^^)

‘남정네들만 없어도 집은 이렇게 살만한 공간이 되는 거였구나’

1박 2일 여행이라도 자주 가시라, 권유 아닌 강권을 해야겠다, 심각하게 마음먹는다.


  휴~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내 사랑들인데...


  찬비 내리는 11월의 첫날, 때는 바야흐로 따뜻한 것들이 그리워지는 계절일지니, ‘저녁에 식구들 모이면 뭐라도 해줘야겠구나’ 하며 아침산책 겸 장을 봐오기로 하고 가을 속으로 걸어 나갔다.


  산책 후 장보기라 그런 것이 아니라 요즘은 실로 장보는 일이 즐겁다.

여름 햇빛을 가득 담은 밭작물들이 찬 바람에 몸을 움추르며 속으로 속으로 익어가고 차오르는 계절이므로 피가 돌고 살이 오른 그것들이 달아지고 또 달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배추와 무는 잎맥 사이사이로 물이 올라 달디 달 때다. 값도 많이 내렸으니 모시고 오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4,000원을 주고 산 무가 지금은 하나에 1,900원이다. 씨알도 굵다. 배추도 3포기 1망에 6,900원인 것을 한 포기만 달라해서 2,500원에 사 왔다.

으슬으슬 찬비가 내리는 날에는 뜨끈한 배춧국을 끓여 먹어야겠다 생각한 것이다.


  집에 와 배추와 무를 부려 놓으니 널려있는 본새가 딱 봐도 배추도사 무도사라, 혼자 웃었다.

90년대 배추도사와 무도사, 은비 까비가 출연했던 <옛날 옛적에> 프로그램이 노래와 함께 떠올랐다. 내가 시청할 나이도 아니었고 보여줄 꼬맹이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다 알고 있는 전래동화, 옛이야기가 어쩌자고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남에 번쩍 북에 번쩍 배추도사 무도사님, 맛깔난 이야기 들려주셨듯이 오늘도 맛있는 음식 만들어 주셔야 해요. 손뼉 치며 으쌰쌰~ 해드릴게요.’


  무도사는 깍둑 썰어 소금에 절여 놓았다. 깍두기를 할 참이다. 일부는 배춧국에 넣을 양만큼 채 썰어 놓는다. 배춧국에는 배추도사와 무도사가 함께 있을 때라야 구수하고 시원한 맛이 배가 된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부부였을 것이다.


  배추도사는 중간 켜와 속 켜를 사용해 배춧국을 끓이고 바깥 켜는 데쳐 놓았다. 된장 양념에 무쳐 배추 나물을 해 먹어도 좋고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나중에 시래깃국을 해 먹어도 좋다.

칼칼한 청양고추와 홍고추로 색을 내고 보리새우를 더하면 배춧국에서 해물탕의 시원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꿩 먹고 알 먹기다.

‘배추속대국’이라 이름하기도 하나 편한 대로 배춧국이라 한다.


  절여진 무도사는 씻어서 물기를 뺀 후 양념을 넣어 박박 버무린다. 여름, 가을 깍두기에는 홍고추와 양파, 사과, 배 등 집에 있는 재료를 함께 갈아 넣어 버무리면 단 맛이 깊어 맛있다.


   깍두기를 담가 놓고 혼자 아점을 차려 먹는다.

딸은 학원에 갔고 식탁 위에는 3일 전 결혼기념일에 아이들에게 받은 꽃도 꽂혀 있고 향초도 피웠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이것이 우아한 혼밥의 세계!


후루룩 쩝쩝~ 식구들이 모두 둘러앉아 한 냄비 가득 담긴 국을 뚝딱 비워내는 것도 보람된 일이겠으나,

호로록 냠냠~ 혼자만의 배춧국을 먹는 시간도 꿀맛처럼 달다. 노란색 속배추는 고소하고도 구수하다.


  배추도사와 무도사를 함께 다시 한번 소환해야겠다. 배춧국만으로는 식사를 할 사람들이 아니다. 고기나 여타 음식이 동반되어야 한다. 수육과 먹으면 좋을 일이나 오늘은 굴과 함께.

  

<무채 전>

1. 무는 채 썰어 소금에 살짝 절였다가 10분 후 씻어 꼭 짠다.

2. 부침가루에 계란 하나 섞어 부친다. 보리새우도 몇 놈 넣으니 고소함은 배가 된다.


  굴전은 뭐, 부침가루 물에 퐁당 담갔다가 하나하나 부치면 된다. 원래 굴전에 양파나 당근 등을 채 썰어 함께 전을 부쳤었는데 야채가 들어갔다 아니 먹으니 굴로만 전을 부칠 밖에. 그러나 무채 전... 요거요거 은근 요물이다. 무에서 시원하고도 고소한 맛이 나와 슴슴하고 들큰하다. 할머니 냄새도 나는 것 같다. 식감도 아삭아삭 씹을만하다. 감자전 맛이 나기도 하고, 보리새우 때문에 전에서 해물맛이 나기도 해서 ‘신의 한 수’라 할만하다. 부침개는 언제나 기본 맛이 보장되는 ‘진리’다.


  아침저녁으로는 찬바람이 제법 옷깃을 파고드는 스산한 가을이다. 오늘처럼 찬비가 내리는 날에는 물이 가득 오른 배추로 토장국을 끓이고 무로는 고소한 전을 해먹을 일이다. 노란 속배추로는 식탁에 꽃을 피울 일이다.


  배추도사 무도사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옳다.


 ‘그나저나 우리 집 남정네들, 올 때가 됐는데...’


  기다리는 가을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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