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본인 친구 #2

네 시간 전이었다. 진석은 예인에게 콘돔을 받았다. 예인은 그 나이 먹을 때까지 콘돔도 안 사 보고 뭐했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등학교 시절 진석의 여자친구는 학교 근처 원룸에서 자취를 했다. 두 사람에게 섹스는 계획이 아닌 본능이었다. 같이 공부를 하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키스를 했다. 그의 손이 옷 속을 파고들었고 그녀의 손이 바지 속을 헤집었다. 부엌 싱크대 옆의 크린백이 피임 기구였다. 그는 주머니에 넣은 콘돔을 부적처럼 만지작거렸다. 이 콘돔 하나가 목표를 향한 열정을 불태워줄 것이라 그리 생각했다.


무용학과와의 미팅을 알게 된 건 일주일 전의 일이다. 1학년 녀석들은 한 녀석이 펑크를 냈다며 짜증을 냈다. 트뤼포와 눈싸움을 할 시간이 아니라고 여긴 진석은 어린 동생들의 어깨에 손을 얻었다. 강압적인 눈빛과 잔뜩 힘을 넣은 손가락에 기가 죽은 동생들은 화석이라 불리는 선배를 끼워줄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에 들었는데 효림이가 그 미팅에 나온다더라.


이름도 외우기 힘든 융합 뭐시기 학과의 원우가 알려준 소식에 그는 짜증이 났다. 학기 초, 효림은 밴드부에 들어왔다. 그녀는 OT때 진석의 모습을 보고 반했다며 그의 옆에 딱 달라붙었다. 그 모습이 불편했던 건 졸업한 지 한참이 지난 백수 이름표를 가진 동아리 남자 선배들이었다. 그들은 진석이 여자 친구를 사귀었을 때마다 어땠는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매일을 싸움과 고함으로 시작했고 기력과 체력을 빼앗겼다. 목이 쉬어서 공연을 못한 적도 있었다. 연애는 전쟁과 같았다. 총 대신 마음으로 싸우는. 인디 밴드 생활을 하는 그 몇몇 선배들은 일부러 그가 여자를 사귀지 못하게 만들었다. 성적 욕구를 호소하는 그를 위해 서울 끄트머리 역 근처 모텔에서 여자를 불러주곤 했다. 상대는 팔이 한쪽 없거나 허리가 기형적으로 굽은 여자들이었다. 정신도 썩은 것들이 돈도 없구나. 소주에 부대찌개 국물을 계속 리필 해 먹는 선배들을 보며 진석은 생각했다.


효림의 경우도 진석을 보고 들어온 다른 여자들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녀의 주변으로 여선배들이 모여들었다. 그녀들은 참새처럼 짹짹거렸다. 김진석은 게이다, 김진석은 발기부전증 환자다, 김진석은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를 좋아한다 등등 소설을 썼다. 효림의 관심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모임 때마다 진석의 옆에 앉았고 밥을 사달라고 졸랐다. 진석은 스토커처럼 따라 붙은 부원들 때문에 몰래 만나는 것도 힘들었다. 그 만남도 키스 이상으로 발전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한 달 후, 멈추지 않는 관심에 대한 답장이 도착했다. 동아리 방의 문은 잠기었고 CCTV는 잠자리채에 의해 몰래 돌아갔다. 손에 목장갑을 끼고 우비를 입은 졸업생 선배들의 무자비한 폭행이 이어졌다. 효림은 앞니 2개가 부러지고서야 진석을 포기하고 동아리를 탈퇴했다. 언제나 그랬듯 스쿨 폴리스는 고학번 학생들의 높은 언성을 믿었고 사건을 대충 무마했다. 효림 역시 딱히 사건을 키우고 싶진 않아했다.


-그리고 내가 오늘, 너를 만났다.


진석의 한 마디에 효림은 특유의 눈웃음을 지었다. 진석이 보고 반한 그 반달모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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