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본인 친구 #3

후배들의 저항이 없었던 건 아니다. 미팅이 취소되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른 일원을 찾아보던 중 거짓말이 걸렸다. 눈치 있는 선배라면 알아서 빠질 줄 알았건만 돌아오는 건 1학년 전체 기합이었다. 남자고 여자고 할 거 없이 근처 초등학교에 모여 오리걸음을 했다. 선배들은 조교 모자를 쓰고 나타나 프랑스어로 지껄이며 그들 하나하나를 통제했다. 몇몇 후배들은 화를 삭이지 못해 진석에게 달려들었으나 얻어터지기만 했다. 미팅 3일 전, 미팅 장소와 시간을 바꾸었다고 통보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진석을 속였다 생각한 그들은 캐주얼 정장 차림에 부츠를 신고 XX역 앞 분수대에 모였다. 아니, 다행히 모일 수 있었다. 먼저 도착한 한 명이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낸 덕분이다. 그 새끼 와 있다고.


대학교 1학년 때 진석은 입에 거짓말을 달고 살았다. 선배들은 강압적이었고 불편한 부탁을 강요했다. 당시 여자친구라 여겼던 년들은 그의 지갑에서 한 푼이라도 더 빼내기 위해 오기와 끈기를 부렸다. 진석은 거짓으로 깁스를 했고 거짓으로 지갑을 비웠다. 거짓으로 먼 친척을 죽이기도 했다. 거짓을 눈치 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검은 바둑돌 사이에 하나의 흰 바둑돌이 있다면 그게 거짓이다. 덜떨어진 신입생들에게 흰 바둑돌은 미팅이다. 검은 바둑돌은 머뭇거리는 태도, 마주치지 못하는 눈, 쉬는 시간에 자기들끼리 모여 히히덕거리는 모습, 어깨 너머 보이는 카카오톡의 내용 정도랄까. 하나의 진실을 가리기 위해 뭉친 거짓들은 오히려 티가 나기 마련이다. 그가 불편한 동행을 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효림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확신했다. 믿음이란 건 그 어떤 의지보다 확고하다고.


진석은 천장을 바라본다. 그 천장에는 그가 있다. 웃고 있다. 입이 찢어져라 웃음을 터뜨린다.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에서 효림을 처음 본 날, 그는 눈을 의심했다. 중학생 시절 효림과 비슷한 이름의 아이를 좋아한 적이 있다. 그 아이도 효림처럼 단발에 눈웃음이 예뻤고 키와 체구가 작았다. 그 애가 전학을 가게 되자 진석은 조바심이 났다.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를 누르기 힘들었다. 그는 버디버디를 통해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송곳처럼 진심을 전했다. ‘나 사실 예전부터 너 좋아했어.’ 4시간 동안, 노란색 이모티콘이 검은색으로 얼굴색이 바뀌어 나갔다는 표시를 보일 때까지 그는 답장을 기다렸다. 하지만 오질 않았다. 효림과 헤어질 때도 그런 기분이었다. 효림은 퉁퉁 부어터진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다. 그건 아주 독하고 더러운 의식이었다. 동아리를 탈퇴하는 사람은 공개청문회를 해야 했다. 탈퇴하는 이유와 질문들에 답하는 모습이 찍혀야만 나갈 수 있다. 선배들은 효림을 강의실 앞에 세우고 책상에 앉아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실소를 터뜨렸다.


-올 때는 절대 안 나갈 거처럼 그러더니 왜 나가려는 거죠?

-의지가 없나 보네. 넌 어딜 가도 실패하겠다.

-처음 봤을 땐 예쁜 줄 알았는데 얼굴도 마음도 썩었네.

-나가서 우리 밴드부 이상한 소문내는 거 아닌지 몰라. 왜 너한테서 구린내가 날까?

-혹시 다른 동아리 가면 거기서는 남자한테 꼬리치지 마라. 역겨우니까.


울음은 효림이 아닌 진석이 터뜨렸다. 그는 맨 뒷자리에 앉아 세상이 떠라가라 울어댔다. 효림과 진석은 미팅이 진행되고 20분이 지났을 무렵 카페 뒤편의 주차장에서 만났다. 진석은 효림의 귀에 대고 민경훈의 <아프니까 사랑이죠>를 불렀다. 효림은 그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둘은 지겨운 미팅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원숭이처럼 방방 뛰는 후배들 사이에서 진석은 성숙한 눈빛으로 효림을 붙잡았다. 노래방까지 기다리기에 인내는 빛을 잃었다. 이제 어둠을 향할 때라고 직감이 말했다.


-미안한데 제가 학원 아르바이트가 있어서요. 이렇게 늦게까지 할 줄 몰랐네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나 집에 가봐야 될 거 같아. 강아지가 많이 아프다네. 미안, 먼저 가볼게.


둘은 서로 반대로 걷다 사람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일행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손을 맞잡았다. 달빛 같은 눈웃음으로 효림은 말했다.


-오늘 밤새도록 들을 수 있는 거지? 오빠 생 라이브로 오르가즘 느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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