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잔 할래?
나는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에게 카페는 앉아서 마땅히 얘기할 곳이 없거나 화장실이 급할 때 들어가는 곳이고, 예쁜 곳에서 기분 전환하는 곳이지 커피맛을 음미하는 곳은 아니다. 그러니까, 커피맛을 잘 모른다는 말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는 백군이 타주는 G7에 연유를 8:2 비율로 넣은 인스턴트커피다. 그마저도 한두 모금이면 족하다.
그런데도 백군이 "커피 한잔 할래?"라고 하면 왠지 그렇게 기분이 좋다. 커피라는 단어에 붙은 달달함도 떠오르고, 커피 향이 가득한 느긋한 시간도 기대되기 때문이다. 막상 커피는 다 마시는 법이 없지만, 그 시간만은 항상 기분 좋게 남아서, 커피라는 단어에 설레도록 조건화되어버렸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지만 커피라는 단어에 설레는 건, 스타벅스를 싫어하면서 스타벅스 로고를 보면 들어가고 싶은 건, 햄버거를 먹으면 속이 불편한데도 버거킹 간판을 보면 반가운 건, 하두 해 먹어서 이젠 질렸는데 바질만 보면 카프레제를 하고 싶은 건, 도대체 왜 때문일까. 얼마나 많은 것들에 자동 반사되고 있는지 다 나열하기도 힘이 든다.
요즘 백군과 나 사이에 유행어가 있는데 "난 이렇게 조건화되어있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많은 것의 핑계가 되는데 예를 들면 이렇다. 내가 밥을 먹고 소파에 누우면 백군이 째려본다. 그럴 때 "난 밥 먹고 소파에 눕도록 조건화되어있어."라고 말하면 백군은 "난 니가 밥 먹고 설거지하면 예뻐 보이도록 조건화되어있어."라고 하고, 나는 "잔소리 들으면 더 하기 싫게 조건화되어있어."라고 한다.
물론 이건 농담에 더 가깝지만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에게 깊이 조건화되어있는 것들을 생각해보고 나누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자동으로 반응하는 것들에 대해 꽤 많이 알게 되었고, 스스로도, 서로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럼, 다음부터 버거킹 간판이 보여도 홀리듯 들어가는 대신 '응, 그냥 조건화된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