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마당에 두 평 정도 되는 장독대가 있고 색 바랜 기와가 내려앉은 단층으로 외벽 몰탈이 일어나 균열을 시멘트 땜질로 덧댄 보금자리다. 부부는 고된 일을 마치고 부엌과 내실이 턱으로 분리된 방문 옆에 기대어 양은 접이식 밥상에 차린 막걸리 사발과 둥글게 펼친 김치전을 안주 삼아 하루 일에 대해 주거니 받거니 한다.
시내에서 채소 가게를 하는데 성실한 남편 덕택에 가게가 조금씩 번창해 제법 단골손님도 모이고 주변에서는 이 집 채소가 싱싱해서 맛이 있다는 소문으로 장사 재미가 쏠쏠하다.
부인의 언니가 몸이 불편해 운영하던 청과물 가게의 유지가 어렵다며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여동생에게 주변보다 싼 가격에 가게를 내줄 테니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수도권에서 노동일을 하며 하루하루 벌이를 이어가던 제부와 동생이 안타까워서 그러는 거라며 일을 맡아서 해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이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될 때쯤 신랑은 기존 청과물 납품업체 물품이 갈수록 비싸지고 품질이 떨어져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서 직접 물건을 떼다 파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상의한다. 부인은 남편 말에 괜찮겠냐며 새벽에 운전해서 가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 걱정이 앞선다.
우선 물건을 떼오려면 화물차가 있어야 하는데 차를 살 돈도 없고 혹여나 사고가 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선뜻 확답을 못한다. 이때 옆집 아저씨가 사고로 운전을 못해 트럭이 서있다는 주민들의 말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달려가 화물차를 팔 의향이 있는지 묻는다.
"차는 오래됐지만 보기보다 관리가 잘돼 잘 나갈게요"
"댁에서 필요하다면 그냥 갖다가 쓰구려 팔기는 좀 그러니..."
"아니 그래도 어떻게 그렇수 있나요"
"값은 치러야 지요"
"그럼 차 보험료랑 세금만 내주고 후딱 가져가게나"
"정말 감사합니다."
부부는 옆집 아저씨 맘이 변하지 않게 눈앞에 있던 종이 박스에 보험료와 자동차세 납부 외에 별도로 매달 10만 원씩 차량 사용 대금 지급을 약속하고 계약을 체결한다. 차도 생겼고 이젠 번창할 일만 남았다며 부부는 손을 꼭 잡고 앞날을 기원하며 눈물을 흘린다.
사실 부부는 동성동본으로 혼인을 하지 못한 채 사실혼 관계로 함께한 지 10년이 넘었다. 자식도 없고 어려운 처지에 둘이 만나 서로를 위하며 살고 있다. 부인은 경미한 지적장애를 가졌고 남편을 알코올중독 치료센터에서 지인 소개로 부인을 만났다. 성과 본이 같아 친오빠와 동생 관계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한다. 먼 타지에서 같은 성을 가진 인연으로 서로를 보살핀 지 3개월 정도 지나 센터 치료를 마치고 나온 오빠가 기거할 곳이 없다고 하자 동생이 자기 집에서 함께 지내자고 하여 서로 도움을 주면서 정들어 부부 관계로 발전한다.
추석이 다가오면 대목이 따라오는 시간이다. 지금까지 뿌린 정성을 수확하는 계절이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농작물을 걷어들이 듯 청과물 가게도 대금을 걷어들여 통장에 잔고가 쌓이는 날이 계속되고 있다. 추석을 앞두고 많은 물량을 시장에서 떼가지고 왔지만 냉온창고가 마련되지 않아 수명이 짧은 채소와 과일보다는 상온에서도 보관할 수 있는 상품으로 진열장을 채워야 하는 한계가 있다.
매일 새벽에 물건을 떼오면서 기진맥진한 몸이지만 통장에 늘어나는 숫자를 보면 기운이 샘솟는다. 돈통에 놓아둔 빳빳한 농협 통장 날개는 어느새 흐물거리는 매생이가 되어 있다. 피곤하면 돈통에 있던 통장 내지를쳐다보며 힘을 내고 또 쳐다보고 웃고, 부인과 번갈아 보면서 힘을 내어주는 마법의 숫자다.
추석 차례상을 차려야 한다며 처형이 가게에 들러 훑어보더니 장사가 잘돼서 상품이 늘었다며 가겟세를 올려야겠다고 농담한다. 그러다 돈통에 있던 날개 속에 적힌 숫자를 보더니 입이쩍 하고 벌어진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정말 많이 벌었네"
"이렇게 큰돈은 일 하면서 만져 본 적이 없었는데"
상품이 많아지고 단골이 늘면서 매출은 늘었지만 매입에 따른 비용도 커졌고, 청과물 시장 상인들이 부부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되어 15일 주기 후불 결제 방식을 받아주는 배려로 통장에 들어 있는 숫자의 절반 이상은 외상이고 실제 번 돈은 처형이 생각한 만큼 크지 않은 수준이다.
오늘은 추석 전날로 대목 행사를 끝낸 부부는 지친 몸을 이끌고 다 팔지 못해 남은 상품을 내일이라도 가게 문을 열어 모두 팔 것을 다짐한다. 부인은 접이식 밥상에 김치전을 젓가락으로 먹기 좋게 벌리고 남편은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켠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부인이 눈썹에 힘을 주며 근심 어린 눈으로 남편을 한번 쳐다보더니 언니랑 가게 뒤에서 나눈 이야기를 꺼낸다.
"여보 당장은 아닌데 내년부터 가겟세를 두 배 올려달라고 하네"
"언니가 통장을 보더니 그만큼은 이제 받아도 될 것 같다고 해"
남편은 못 들은 척하며 처형께 우리 형편을 다시 말하고 1년 정도는 더 기다려 줘야 되는 게 아닌지상의해 보라고 한다. 부인은 언니가 몸이 아파 병원비가 많이 나와서 그러는 거 같다며 남편 말에 호응하지 않는다.
"우리 형편이 지금 나아진 게 없잖아"
"당신이나 나나 얼마나 힘들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트럭에서 웅크리고 자면서 어렵게 버티고 있는데..."
지금 당장 찾아가 언니가 오늘 한말을 물려달라고 남편은 요구하지만 부인은 언니 사정도 딱하니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감내하자고 그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하잖아"
"가족이라며 그래서 우리 보고 잘살라고 그랬잖아"
부인은 대답하지 못한 채 남편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방바닥에 시선을 고정한다.
"정말 더럽고 치사해서 못해먹겠구먼"
"내가 당장 이 짓거리를때려치우던가 해야지"
"너랑도 갑갑해 못살겠다"
"너희 언니랑 둘이 잘 먹고 잘살아라"
막걸리 사발을 들이켜더니 씩씩거리며 냉장고 채소 보관함에 있던 소주 한 병을 꺼내 뚜껑을 이빨로 따더니 병째 나발을 분다. 부인이 만류하지만 욕설을 하면서 흥분하기 시작하는데 예전 센터에 처음 입소하여 치료받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정신이 온전하지 않아 보인다.
"오빠 그만해"
"너 당장 가서 부탁할 거야 안 할 거야"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알아볼게"
"당장 나가서 말하고 오란 말이야"
"아니면 내가 차 끌고 가서 다 때려 부수고 때려치울 테니..."
남편이 차키를 가지고 나가려고 하자 부인이 남편의 왼쪽 팔을 잡아당긴다. 이내 놓치는 바람에 부인 손톱으로 남편의 왼쪽 팔이 깊게 파여 쓸려나간다. 눈이 돌아간 남자는 더욱 거친 욕설과 함께 손바닥과 주먹으로 여자의 얼굴을 때리고 옆에 있던 난초 화분을 왼손에 들더니 여자 머리를 향해 던진다. 머리에 부딪혀 깨진 화분으로 여자 이마에 피가 흘러내리자 더욱더 흥분한 남자는 괴성을 지른다. 밖으로 도망가는 여자를 맨발로 따라가더니 장독대에 있던 항아리 뚜껑으로 여자의 정수리 부위를 내리친다.
"큰일 났어요. 남자가 여자를 때렸어요"
"여자가 주져 않아 일어나지 못해요"
주민들이 쓰러져 있던 여자를 보고 119로 신고하여 피투성이가 된 여자는 시내 종합병원으로 후송되었고 경찰이 현장에 왔을 땐 이미 병원으로 출발한 상태다. 여자는 피를 많이 흘려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고 밖에서 수군거리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병원에 가서 피해자 보호 및 진술 청취 방안과 거실에 있는 남자의 신병 처리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문틈으로 보이는 남자는 주방 겸 거실로 쓰이는 장소에서 원형 테이블에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데 혼이 나간 듯한 상태다. 남자의 신병 확보가 피해자 진술보다 선행돼야 한다고 판단해 주방에 들어서자 벽면에서 쉬이익 쉬익 소리가 나면서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메케한 냄새가 진동한다. 이때 남자는 재떨이에서반쯤 피다 꺼 버린 담배꽁초를 집더니 입에 물고선 라이터를 갖다 댄다.
"당장 문 열고 창문 제쳐"
손에 든 라이터를 켜려는 순간 주자가 홈으로 슬라이딩하듯 라이터를 낚아 채 빼앗고 남자를 쓰러뜨린다. 남자의 양손을 뒤로 재치고 수갑을 채우면서 체포 사유, 변호인에게 도움을 받을 권리,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고지한다. 10분 뒤 피해자가 사망했으니 피의자 관리에 만전을 기하라는 무전음이 주인 떠난 주방에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