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논문을 못 쓰는 이유 ▶ 자아비판에 글을 멀리하기 때문이다.
* 프롤로그
[나만의 레벨 상승으로 심장이 뜨겁다.]
성공의 상징으로 살아온 과거를 멋지게 보여줄 방법은 무엇일까? 상징성 있는 자격에서 시작된 학위 취득의 열망은 최종 레벨인 박사 취득을 목표로 폭주 기관차 바퀴가 차가운 선로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번뇌의 전차에 올라타 학업에 열중하지 못한 애달픔이 가슴 한편에 층층이 쌓여 탑을 이룬다.
직장에서 어느 정도 익숙한 흐름에 단조로움이 생기고 가정에서도 신혼 초 육아와 일을 병행하던 복잡함이 벗어날 때쯤 작은 욕구가 생겨난다. 이렇게 살다가 가면 밍밍하지 않을까 하며 세상에 태어났다면 뭔가 작은 흔적이라도 남기면 좋지 않을까 하는 별의별 생각이 허공을 한참이나 떠다니고 있을 때, 작은 소망이 목젖에 걸려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바둥바둥 댄다.
거친 환경을 탓하며 목이 타오를 때면 침을 모아 삼긴 채 꾹꾹 참아온 제 안의 꿈틀거리는 갈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걱정 반 희망 반으로 자기 학습이 가능한 대학원 입학을 망설이다가 대학원 석사과정에 도전하면 뜨거운 심장의 감성 호수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는 “심장에서 감성이 표출되었다.”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사람이 흥분했을 때 신체적 반응이 가장 활발하게 나타나는 중요 기관인 심장의 박동 변화를 통해 감성이 표출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석사과정을 밟으려면 할 일이 많다. 시, 소설, 수필 글짓기를 통해 글쓰기를 시작하자. 글을 잘 쓰려면 잘 쓴 글을 읽어보고 느낀 감동을 제 작품에 품어서 녹이는 방식을 추천한다. 논문도 이전 우수한 성과로 학위논문을 통과한 같은 학과의 선행 논문과 유사한 구조에 맞춰 구성한 주제로 진행한다면 학위논문 졸업은 따 놓은 당상이다. 우수 논문을 쓰기 위해서 좋은 논문을 탐독하고 그 기준에 맞춰 논문을 쓰다 보면 어느새 높은 수준의 논문이 펼쳐진다.
충만한 에너지를 가졌다면 신춘문예에 도전하자. 논문을 쓰면서 다듬어진 칼을 고이 보관할 필요가 없다. 재야의 고수들이 칼 솜씨를 뽐내는 경연장에서 상금도 타고 이름도 날리고 재미있는 도전이다.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최고 수준에 맞는 책을 출간하자. 논문 쓰는 과정에서 파악한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다 보면 재미와 흥미가 맴돌기 때문에 소재를 찾거나 글을 쓰는데 쉽게 지치지 않는다.
책을 출간했다면 해당 책을 가지고 이름값을 높이자. 졸업한 대학에서 강의도 할 수 있다.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평생교육원에다 학과 개설을 요청하고 출간 책 내용으로 강의를 시작하자. 박사학위를 가졌으면 자기 소개란에 강의 경력도 집어넣어야 전문가 반열에 들었다고 자부할 것 아닌가.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학위논문을 쓰고 졸업해야 한다. 학위를 받기 어려운 이유는 5명의 선행 박사에게 3번의 심사를 통해 박사 학위 논문으로 인정받아야 하는데, 선행 박사가 능력이 부족한 자의 미흡 논문에 인준 서명으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에 자신의 명예를 걸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고된 과정을 거치고 박사 학위 논문을 인준 받고나면 제 학업 분야의 최고 레벨 달성으로 자체 각성한다.
▶ 자아비판에 글을 멀리하기 때문이다.
자기 겸손을 넘어 자아비판에 글을 멀리하기 때문이다. 통계는 하나도 모른다. 글을 못 쓴다는 것은 거짓이다. 대학 과정을 거쳐서 논문 쓰는 단계에 들어섰는데 글을 못 쓴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논문을 써본 경험이 없어 생소할 뿐이다. 원고를 작성하고 거울 앞에서 자신을 향해 글을 못 쓰는 이유를 3가지 들어 설득해 보자. 스스로 설득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글을 쓸 수 있는 반증이다.
“누구의 중심에서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계의 개념 관계는 설정이다. 죽은 이를 바라본 타자의 관점에서 죽은 이의 사후 세계가 타자의 현실 세계다. 사후 세계는 형이상학적 관점과 세포생물학, 신경생물학, 신경생리학, 신경내분비학, 신경학, 신경유전학, 신경심리학 관점으로 뇌의 기능과 행동의 관계를 연구해야 한다. 다양한 학자들이 형이상학적 관점과 소통하며 연구를 수행하면 좋겠지만 각 학문은 과학적 분석 방법만을 우선하기 때문에 철학자적 사고로의 접근을 제한한다.”
물질이 소멸하면 흔적이 남는다. 죽은 자는 감성 없는 물질로 남고 피동적이다. 주변인은 죽은 자를 기억하고 능동적이다. 물리적으로 죽은 자를 화장하면 재가 남고, 땅에 묻으면 시체가 남는다. 정신적으로 고인의 죽음을 아는 가족이나 지인은 추모하지만 죽음을 알지 못한 지인은 대상자를 추억한다. "죽은 자 기준으로 죽음 이후는 사후지만 주변인 기준으로 고인의 사후는 현실이다." 죽은 자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주변인에게 고인은 현실 존재이다. 실종자 기준으로 본인의 사후와 현실은 확정이다. 주변인에게 실종자의 사후와 현실은 불확정이다.
논문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고민의 시간이 가득하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문제를 제기하여 해결하거나 파헤칠 것인가? 왜? 어떤 이유로 설정하게 되었나? 의문에서 시작한다. 어떻게 주제를 풀 것인가? 어떤 근거를 바탕으로 논제를 제시하고 관심을 끌 것인가도 중요하다. 논문은 상상이 아닌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추론해야 하는 글쓰기 과정이기 때문에 고민이 발생한다.
“죽은 이를 바라본 타자 입장으로 죽은 이의 사후 세계가 타자의 현실 세계이기에 현실 세계에서 죽은 이를 추모하고 기억한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세계에 죽은 이가 존재하는 형식이다. 원자 상태로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건은 별론으로, 인간의 형태 문제는 논외로 한다. 접근 방식이나 논증이 쉽지 않다. 원자로 남는다는 구조적 발상은 물질 발생 기원으로 죽음 후 물질이 환원한다는 방식이다. 이를 토대로 사후 세계를 철학자적 관점으로 살펴본다면 누구 입장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계에 관한 개념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실제 집을 짓다 보면 현실적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경제적 문제, 지식 부족 문제, 이렇게 해도 되나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글쓰기 과정에서도 이런 요소로 인해 글이 산이나 들로 가버린다. 중심을 잡고 써야 하는데 중심 잡기가 서툴다. 최우선 과제는 문제의 중심을 잡는 것이다. 종이배를 물에 띄우기 위해 적당한 재질의 종이를 구한다. 재질에 따라 종이접기의 난이도가 다르다. 재질을 정했다면 크기를 정해야 한다. 무엇을 태울 것인지, 태우지 않을 것인지도 고민한다.
“1960년 9월 26일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존 F. 케네디 상원의원과 공화당 후보인 리처드 닉슨 부통령이 4번의 텔레비전 토론 중 첫 번째 토론을 벌인 날이다. 케네디는 구릿빛 얼굴로 건강함을 과시하면서 자신에 차고 거침없이 답변하는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였으나 닉슨은 창백하고 근심 어린 모습을 노출했다. 케네디는 프로듀서와의 사전 제작회의에 참가했으며, 스튜디오 배경을 고려해 검은색 정장과 파란색 셔츠를 골라 입고 앉아있는 동안 피부가 보이지 않도록 긴 양말을 신는 등 치밀하게 준비한다. 닉슨은 사전 제작회의도 불참하고 외관이 좀 밝게 보이게 조명등 아래 앉으라는 측근들의 조언을 무시하는 등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닉슨은 토론 내내 케네디만을 응시함으로써 시청자들과 거리감을 뒀으나 케네디는 카메라, 즉 국민을 정면으로 보고 얘기했다. 토론 다음 날 케네디 선거 유세장에 케네디의 나이와 종교에 관하여 의심하거나 그에 대해 많이 몰랐던 민주당과 무당파 지지자들이 운집했고, 심지어 보수 성향의 주지사와 유권자들조차 케네디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서는 등 파장은 엄청났다.”
[지구인 중심주의]
지구인 상념은 우주 확장의 근원이다.
지구인 상념으로 우주 공간이 채워진다.
관측하는 순간 공간은 확장한다.
전자는 관측 순간 변화가 생긴다.
논문을 쓰는 사람은 케네디와 같은 성향을 지녀야 한다. 건강한 낯빛에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처음부터 논문을 척척 써 내려가는 사람은 없다. 처음 써보는 글이라 서툴 뿐이다. 중심을 잡고 방향만 잘 잡으면 논문을 못 쓸 이유가 하나도 없다. 지도교수 앞이라고 주눅 들지 말고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당당하게 논문을 쓰겠다는 결의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