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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킬번댁 Oct 23. 2021

이거 하나면 스페인은 게임 끝!

아빠의 배꼽시계가 인내심을 잃고 폭주 한지 오래다. 지금부터 내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10분 남짓. 그 안에 식당을 찾아야 한다. 만약 실패했다가는 '첫사랑 그 집'을 찾기는커녕 엄마 등짝 스매씽에 빈정만 상할게 뻔했다. 그런데 이런 제길! 조바심 때문에 집중이 안된다. 벌써 몇 시간째 고딕지구 주변과 항구 근처를 돌고 있는지 모른다. 지도상으로 보면 여기저기 모두 연결된 곳이라 어려울래야 어려울 수 없는 길인데 무슨 노래 가사도 아니고 다시 돌고, 돌고, 또 돌고 있느라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다.


그래 봤자 빠에야 맛집을 찾는 중인데, 고작해야 내 이십 대의 추억 정도만 버무려진 곳인데 그게 무슨 대수나 된다고 식구들 배까지 곯게 하며 유난을 떠는 걸까. 사실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고 민망스럽긴 하다. 그런데 왜인지 그곳만은, '내 첫사랑 그 집' 만은 절대 포기가 안된다.


부모님 말씀도 맞았다.

우리나라 비빔밥이나 불고기처럼 스페인의 보편적이면서도 유명한 전통 음식 중 하나가 빠에야니 어디서 먹든 평타 이상의 맛을 보장할게 당연했다. 우리나라 어딜 가서 먹어도 비빔밥과 불고기가 맛없기 힘든 것처럼 빠에야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도, 그걸 알면서도 반드시 '그 집'을 고집하는 이유는 바로 좋은 기억을, 추억을 가족에게 공유하고 싶은 그런 욕심 때문일 것이다.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한대 맞고 주변을 얼마나 돌았을까?  드디어 식당이 보인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다. 식당의 규모가 커진 것도 이유였겠지만 무엇보다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직원들의 반응이 그러했다. 스페인 사람들의 다정하고 따뜻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 기억되는 곳인데, 그래서 더더욱 가족들과 함께 오고 싶었던 곳인데 이런 냉담한 반응 이라니. 그래서일까? 살짝 실망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서운한 것 같기도 하고.


주문을 받으러 온 직원에게 반색하며 몇 년 전 이곳에서 최고의 빠에야를 먹었다며 알은척을 했다. 그리고 최고의 빠에야를 다시 먹기 위해 가족들과 왔노라 보고하듯 전하자 무표정의 직원은 이렇다 할 대답도 없이 주문지만 들고 쌩 하니 자리를 떴다. 직원의 불친절함을 느낀 엄마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여기 식당 직원들은 너무 바빠 힘들어서 그런가 얼굴에 표정이 없네. 내 돈 주고 먹으면서도 잘못해서 혼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


내 마음도 그랬다. 손님을 향한 그들의 무관심함이, 귀찮다는 반응이 몹시 불편했다. 그들이 나를 몰라보는 것은 당연할 테고 유명 관광지 식당 직원이라면 으레 그럴 수도 있겠다 이해를 하면서도 왜 자꾸 상처 받은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물론 고생하며 함께 온 식구들에게도 면이 안서 난감하고 민망하기도 했고.


인간의 탈을 쓴 로봇 같은 직원이 맛있게 먹으라는 말 한마디도 없이 큼직한 냄비를 내려 놨다.

갖은 해물과 샤프란 소스로 노랗게 물든 빠에야는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군침도는 냄새를 사방으로 풍기고 있었다. '그래. 음식점에서 맛만 좋으면 되지. 뭘 더 바래.'



"이게 그 최고의 맛 어쩌고 그거라고?"


배고픔을 제일 많이 탄 아빠를 시작으로 그다음은 엄마, 마지막으로 딸아이가 크게 한 숟가락씩 빠에야를 입에 넣었다. 그런데 지? 가족들의 표정이 불편해 보였다. 심지어 방금 전 한 숟가락 뜬 게 전부인 아빠는 배가 불러 더는 먹을 수가 없다며 손 사레를 쳤다. 불과 삼십 분 전에 배고픔으로 폭주한 아빠였는데 드시길 거부하고 있다니. 그런데 아빠뿐만이 아니다. 식구 모두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미간에 힘을 주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아이가 빠에야를 뱉으며 몸을 부르르 떤다.


" 으웩~! 엄마~ 이게 대체 워야?  맛이 썩은 거 같아."


"윤이 말이 맞다. 이거 소태다 소태! 이것도 음식이라고."


"아이고야~ 지금부터 내 인생에 제일 맛없는 음식은 이거 이거. 빠엘롱인지 빠가사리인지로 해야겠다"


눈물까지는 아니더라도 접시까지 싹싹 비우는 감격에 겨운 리액션을 예상했는데 지금 이 낯선 분위기 뭐지?

그 맛있는 빠에야를 앞에 두고 이런 반응이 나오다니. 너무 충격적이었다. 대체 뭣이 문제인데?


예상하지 못한 식구들의 반응이 당황스럽고 또 불편했다. 그 맛이 얼마나 형편없었으면 집고 있던 숟가락을 팽개치듯 던져 버렸을까. 얼마나 최악이었으면 목에 넘기기도 버거워 뱉어 내버렸을까.

그럴 리 없었다. 이 빠에야는 이미 내가 먹어본 맛, 한마디로 맛이 보장된 음식 아니었던가. 다들 미식가 흉내라도 내는 것일까?  도저히 맛없다는 그 말을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아니 그러기 싫었다.

그래서 식구들 보란 듯이 빠에야를 입속으로 퍼 넣었다.


으허어어억!! 대체 이게 뭔 일이래?


내가 알던 그 맛이 아니다. 내 기억 속 빠에야의 맛이 아니란 말이다. 이건 일부러 소금을 들이붓고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짜서 먹을 수가 없었다. 소금 만으로는 이렇게 짤 수가 없다는 엄마 말처럼 짜도 짜도 너무 짰다. 아빠가 숟가락을 던지고 인생 최악의 음식으로 빠엘롱을 꼽은 이유가 충분히 납득될 만큼 그렇게 짰다. 


그런데 무슨 오기였을까? 가족과 추억을 공유하고자 했던 내 계획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 (미련하게도 ) 꾸역꾸역 입안 가득 소태 빠에야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못 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유럽 음식은 원래 간이 세다며 합리화를 시작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첫사랑은 무조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야 하듯 내 인생 첫 빠에야도 무조건 맛있음으로 남아야 했다. 그래야 내 인생 추억의 맛도, 내가 이곳에 식구들을 데려온 이유도 지킬 수 있게 되니까.


그런 내 모습을 보다 못한 엄마가 음식 접시를 치워 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더니 뱃속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짰던지 소금기에 혓바닥이 얼얼해져 있었고 위장은 이제 그 개떡 같은 음식 좀 그만 들이부으라고 항의하듯 위산을 콸콸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달콤했던 첫사랑의 맛이고 나발이고 속을 게워 내든, 물을 먹어 넘기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결국 나도 소태 빠에야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여기가 아버지 굶기면서까지 데리고 온 그 뭐시냐 첫사랑의 맛인지 뭔지 거기냐?"


"아.... 몰라. 아빠는 무슨 불난 집에 기름 부어? 맛없으면 그냥 맛이 별로다. 하면 되지 온갖 미사여구 다 붙여서 끔찍하네, 음식이 썩었네, 그런 말만 하고. 내 입장은 생각도 안 해?"


"딸램아.... 원래 첫사랑은 가슴에 담아두는 거란다. 누가 바보같이 첫사랑을 들춰보려고 해? 아~ 여기 있네 그 바보가. 허허허"


내게 친숙한 기억이 다른 이 에게는 낯선 강요가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서였을까, 영원히 아름다울 것 같은 첫사랑의 실제 모습에 실망해서였을까 식어가는 빠에야를 보고 있자니 갈비뼈 아래쪽에서 울컥하는 무언가가 명치를 타고 올라왔다. 금단의 상자를 열어본 판도라의 마음도 나와 같았을까?


허무하게도 첫사랑처럼 달콤했던 지나간 여행의 추억은 산산조각 나버렸고, 빠에야는 이미 식어버렸다. 주워 담기엔, 시간을 되돌리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상자 안에서 흘러나와 버렸다. 결국 우린 감정만 상하고, 입맛만 버린 채 숙소가 있는 동네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렸는데 숙소 아래층에 있는 레스토랑 직원이 인사를 한다. 그리고 하는 말이.


"왜 여기 머물면서 우리 집에 한 번도 오지 않는 거야?? 우리 집 되게 맛있어!! "


그의 인사에 대답 대신 오는 내내 외워 두었던 스페인어 한 줄을 읊었다. 맛있는 것보다는 소금을 뺀 음식이 먹고 싶었기 때문에.


" 씬 쌀 뽀르빠보르...."

(소금 빼고 주세요)


" 씬 쌀 뽀르빠보르??"

(소금 빼고 주세요??)


" 낄낄낄. 너 짠 음식 먹었구나?"

(그래. 이 사람아. 나 조금 전에 소태 빠에야 먹고 속 쓰린 사람이다. 어쩔래?)



직원은 조금 전 있었던 내 얘기를 듣더니 둥근 배를 잡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리고는 이제부터 먹는 빠에야는 '환상의 맛'이라며 나의 짜거운 악몽을 없애준다고 했다. 그의 허풍도 못 미더웠고 또다시 소태 빠에야를 먹게 될까 자신 없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속는 셈 치고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그의 손에 들려온 것은 시커머죽죽한 색의 빠에야 한 냄비. 오징어 먹물을 사용한 특제 빠에야라고 하는데 입맛 떨어지는 색이라서 그랬을까? 어느 누구도 선뜻 손을 대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지은 죄가 있는 내가 먼저 맛보기로 하고, 여차 하는 순간, 이건 아니지 싶을 때 입속의 빠에야를 뱉어 버리려고 한 손엔 휴지를 잔뜩 들고 드디어 빠에야 시식에 들어갔는데.... 뭐지? 머릿속에 폭죽이 팡팡 터지고 씹다가 혀가 깨물리는 줄도 모를 만큼 끝내주는 맛이 입안에 소용돌이 치는게 아닌가. 후회와 환희가 함께 밀려오는 맛이었다. 이 정도라면 자랑하고도 남을 만큼 끝내주는 맛의 빠에야가 확실했다.


말없이 숟가락을 입에 넣는 내 모습이 다행이다 싶었는지 그제야 세 노약자 분들도 숟가락을 들었다.


"이게 아까 먹은 거랑 같은 음식이라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고?"


'씬 쌀 뽀르빠보르'의 마법이 통했는지 직원의 자부심이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그날 저녁 우린 끝내주는 빠에야로 스페인 만찬을 즐겼다. 즉석에서 코르크를 연 와인으로 만든 샹그리아가 순식간에 비워질 만큼 먹고 마시고 흥겨웠다. 부담을 놓고, 기대를 버리니 생각지도 못한 기쁨이 다가왔다. 왜 진작 이렇게 하지 못한 걸까?


그동안의 나는 가족 여행의 선두에 섰다는 이유로 어깨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무조건 좋은 것만, 무조건 맛있는 것만 찾았다. 그렇다 보니 예전의 추억에 자꾸 기대게 되는건 당연했다. 이미 해봤으니까, 먼저 다녀와 봤으니까 검증이 됐으니 그게 최선이라 믿었던 거다. 그러다 이번 빠에야 사건으로 알게 됐다.


첫사랑의 기억과 지나간 여행의 추억. 이 두 가지는 판도라의 상자와 더불어 절대 열어봐서는 안된다는 것을. 때론 그 기억들이 견딜 수 없이 좋아 보이더라도, 혹시 모를 기억의 왜곡 일지 모르니 끝까지 봉인시켜 마음에 담아둬야 더 가치 있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힘을 조금 빼고, 지난 여행의 추억일랑 꽁꽁 숨겨 두고, 가족들과 함께 추억을 만드는 여행을 해야겠다.

추억은 찾아가는 서비스가 아니라 함께 만드는 소통의 형재 진행형이니 그래서 오늘부터 스페인은 더 이상 '첫사랑 빠에야'가 아니라 '씬 쌀 뽀르빠보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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