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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킬번댁 Oct 23. 2021

인생은 타이밍.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있다.

조심히 그 뜻을 풀어 보자면 아마 이런 뜻이 아닐까 싶은.

을 살아가며 마주하게 되는 기똥찬 순간.

기회와 선택이 적기 적절하고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순간.

실패와 낙담 없이 온전한 성공만 보장되는 순간.

삶의 의미와 깨달음이 완벽한 콜라보를 이루게 되는 순간 말이다.

한 마디로 인생 '계' 탄 날!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의 욜로 여행을 망쳐 버린 그들이(엄마, 아빠, 딸내미) 어떻게 날 인생 '계'  주인공으로 만들었는지, 물개 박수가 절로 나는 인생의 타이밍을 선물해 줬는지 말이다.


스페인을 여행하며 겪은 놀라운 순간의 이야기를 말이다.



어제의 사건은 이랬다.

불운한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지었다는 아파트 '까사 밀라'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당시엔 그 생김새가 기괴해 최악의 건축물로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현재의 예술가들에게 그리고 예술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그곳에 가려던 이었다.


도로 건너 대각선 건물 사이에 겉으로 보기에도 새삼스럽지 않은 개성미를 풍기는 '까사 밀라'가 보였다. 이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도착이. 그러니 조금만 서두르자.... 고 식구들을 독려하는데.

'어랏? 그런데 왜 갑자기?'


보행자 신호를 기다리던 중 딸내미가 목이 마르다며 팔을 잡아끌었다. 평소의 딸내미였다면 ' 당장'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테고 신경질 적으로  팔을 잡아끌지도 않았을 것이고, 아무리 목이 말라도 차근히 이유를 설명했을 것인데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아이는 몸을 버팅기며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신호등이 초록불에서 빨간불로 다시 초록불로 바뀐 다음까지 말이다.


별 희한한 일도 다 있다며, 세상 안 피우던 고집을 뜬금없는 상황에서 피우고 있다며, 그게 왜 하필 지금인지 모르겠다며 아이를 나무랐다. 그러자 당연한 수순인 듯 딸내미는 굵은 눈물방울을 쏟아내며 날 시험에 들게 하는 게 아닌가. 그 거짓 눈물을 보고 있자니 명치가 깝깝해왔다. 당장이라도 궁딩 팡팡 신공을 보여주며 못돼 먹은 고집통 머리를 고치고 싶었지만 벌건 대낮에 그것도 대로 한복판에서 울어대느라 정신없는 아이에게 손을 댔다간 아동 폭력으로 잡혀 가기 딱 좋은 모양새라 입술을 깨물고 아이를 달랬다.


아이의 요구는 간단했다.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는 것. 참을 수 없으니 지금 당장 달라고! 


손녀딸 눈물바람에 마음이 찢어진 부모님은 마치 그라시아 거리 어디 매에 땅을 파 우물이라도 만들어낼 기세로 아이를 달래며 물길을 찾고 있었다. 그 간절함이 통한 걸까? 횡단보도를 등지고 있는 건물 오른편에 숨어있는 작은 마트가 엄마 눈에 띄었다. 묻고 따질 새도 없이 손녀딸 챙기기 달인인 엄마는 이미 몇 발을 앞서 걷고 있다. 딸내미가 오든지 말든지, 남편이 오든지 말든지 관심 없다는 듯.

딸아이 기분도 달래줄 겸 집어온 젤리와 물 세병을 계산하고 아이에게 물을 먹였다. 아이는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자리에서 500미리 물 반 병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러더니 하는 말.


"엄마! 너무 더웠어. 혓바닥이 타는 것 같았다고."

 

헐! 맞다! 스페인의 여름 한낮 기온은 37도를 넘었었지. 그제야 아이의 격한 반항의 이유를 알게 됐다. 하마터면 탈수 증상으로 더 큰일 날뻔한 상황이었던 거다. 그런데 뭐지? 내 기분? 아이에게 미안해해야 하는 상황인데 입 밖으론 까칠한 말들만 삐죽 새어 나왔다.


"아우~ 윤아. 빨리 좀 걸어. 너 때문에 예약시간 늦었잖아. 그러다 못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래"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 같은 까칠한 딸내미 뒷 통수에 주먹질을 하며 따라오는 부모님과 아이가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따라 참을성도 이해심도 여유로울 수 없었던 나는 벌써 방금 전 사단을 낸 횡단보도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다급한 사이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도로는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와 사람들로 뒤엉켜 혼잡했다. 구경꾼으로부터 도로 주변을 통제하는 경찰은 다급해 보였고 분주히 오가는 구급 대원의 모습은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로, 피를 흘리며 머리를 감싼 사람, 차도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놀랐다기보다는 어리둥절했다. 고작해야 몇 물을 사고 마시는 그 잠깐 사이에 까사 밀라 주변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혼란한 틈 속에 앰뷸런스가 요란한 소리를 더했고 방금 전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던 사람은 들것에 실려 나갔다. 그제야 뒷 좌석 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버스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쑥덕거리는 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구멍 난 저 버스는 공항을 오가는 버스였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타고 있던 승객이 많지 않아 사상자가 적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뒤를 이어 귀에 박히듯 들어온 말.

'테러 일지도 몰라.'


듣고 보니 단순한 교통사고는 아닌 것 같았다. 사고를 당한 버스는 어디가 부딪혀 찌그러진 상태가 아니었고, 버스 뒷부분, 정확히는 오른편 끝 좌석부터 두 번째 앞 좌석 절반이 통으로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부분엔 커다란 구멍이 대신하고 있었고. 뿐만 아니었다. 반쯤 열려 찌그러진 화물칸 속 짐들도 널브러지듯 쏟아져 나온 상태였다.


'당황하지 마! 어서 사태를 파악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사건 현장에 눈을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길 건너엔 무표정한 얼굴로 그라시아 거리를 내려 보고 있는 까사 밀라가 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백화점과 고급 브랜드 상점이 늘어져 있었고. 넘치는 인파와 차가 오가는 도로였다.

세상에나.... 어쩌면 테러리스트의 궁극적 목표는 공항버스가 아니라 그라시아 거리를 오가는 불특정 다수의 선량한 관광객이었는지도 모른다. 일명 소프트 타깃.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흔들어댔다.

만약 그때,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때, 아이가 목이 마르다며 칭얼대지 않았더라면, 그런 아이를 우격다짐으로 멱살 잡고 끌고 갔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 끔찍한 타이밍에 뒷 좌석이 오간데 없이 사라진 버스와 횡단보도 중간에서 마주쳤더라면 그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제야 오금이 저리고 머리털이 쭈삣 서기 시작했다.

오늘의 사건은 이렇다.

한 폭의 고운 수채화 같던 6월 중순의 구엘 공원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머리 위를 휘감듯 지나가는 구불한 돌담을 지나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붉고 또 노란 히비스커스를 지나던 참이었다.


가끔은 뜨겁고 건조한 기후 때문에 흙먼지가 날리곤 했지만 사방을 메운 초록의 파도는 순식간에 먼지를 삼켜버렸고 그 모습이 장대해 감탄을 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이미 한 번 와본 곳을 가족들 때문에 다시 오게 됐다며 지루해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나타났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웃고 떠들면서도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변을 탐색하는 그들은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었고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괴나리봇짐을 매고 있었다. 힐끔거리며 지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시선엔 희롱이 섞여 있었고 그래서였는지 불쾌하고 깨림찍 했다. 나도 안다. 이건 분명 어제 있었던 버스 테러사건의 여파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은 단지 희망을 갖고 스페인에 오게 된 이민자일 뿐 테러리스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관광지에 관광객이 아닌 모습을 하고 구엘 공원의 아름다움에 섞이지 못한 채 모나고 도드라져 보이는 그들의 존재는 껄끄러운 게 당연했다.


곁눈질로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다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느니 차라리 자리를 옮기는 게 낫지 싶어 식구들을 챙기는데 그들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런 제길!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그는복숭아뼈 위로 올라온 색 바랜 바지를 너울거리며 내게 오고 있는 길이었다. 심지어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내 시야권 안으로 들어왔다. 


새까만 얼굴에 도드라진 흰자위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온몸의 기력이 뒷목 중간으로 집중되는 느낌이었다. 집중된 긴장이 척추를 타고 등 전체를 저릿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그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러니 그가 날 모른 척 지나가 주길 기다리는 것보다는 내가 먼저 그를 피하는 게 옳았다. 그를 피해 발작하듯 몸을 돌렸지만 내 앞을 가로막은 그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올 것이 왔구나.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였다.


"노노! 돈 와리. 아임 베리 카인드. 뷰티풀 키링~~"

(겁 먹지 마소! 나 겁나 착한 사람! 열쇠고리 파는 사람!)

"원 유로~ 온리 원 유로~!"

(후려쳐서 1유로. 거저 줄게 사가 슈)


' 뭐라는 거야... 키링? 열쇠고리 말하는 거야?'


뭔 영양가 없는 소리를 찰지게도 하나 싶어 그를 올려봤다. 그의 손에 들린 도마뱀 열쇠고리가 보였다. 총이나 칼 같은 테러무기를 갖고 있어야 짝짝 맞는 비주얼의 그였는데 오색찬란 반짝이는 열쇠고리라니.

그제야 큰 덩치의 그가 귀여운 몸짓을 하며 웃고 있는 게 보였다. 허허 거참.

다행이다 안심을 해야 하나 그래도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나. 별것 아닌 상황을 확대 해석해가며 긴장한 스스로를 난감해해야 하나. 어찌할 바 몰라하던 그때 흰자위를 또르르 굴리던 그가 반복해 말했다.


"뷰티풀 키링 온리 원 유로. 베리 뷰티풀~마이 프랜. 수베니어, 프레젠트."


그의 열쇠고리에 제일 먼저 반응한 사람은 엄마와 아이였다. 그 둘은 세상 순둥 한 표정으로 열쇠고리를 흔들며 요술 항아리 같은 가방에서 아름답고 독특한 물건들을 꺼내 늘여놓는 그를 신기해했고 특히 직접 나무를 깎아 유리를 붙여 만들었다는 손바닥만 한 도마뱀 조각을 보여줄 때는 감탄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할머니와 어린이의 열화와 같은 반응에 힘입은 그의 얼굴에 자부심이 드러났다. 그는 자신을 아프리카에서 온 예술가라 설명했고 자신이 직접 만든 작품을 팔며 공부를 하기 위한 돈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그의 작품이 독특하고 아름다워 서였을까? 아니면 그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을까? 그를 향한 의심은 흔적도 없이 증발한 지 오래다.


그가 만든 예술작품에 취해 아이는 도마뱀 조각을 골랐고 엄마는 색색의 타일을 붙여 만든 성가족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모형을 골랐다. 이제 계산만 하면 끝인데, 갑자기 한 남자가 그를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소리치며 뛰어왔다. 남자의 말을 들은 그가 늘여놓은 물건을 다급하게 쓸어 담았다. 물론 내 손에 들린 도마뱀 타일을 포함해서. 그때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호루라기인지 나팔 소리인지 모를 빵빠레가 울려댔고 웅성거리는 소리로 주변이 시끄러웠다. 경찰이었다


"오케이! 파이브 유로!"

(좋아! 5유로!)


정신없이 물건을 챙겨 넣는 그가 자기의 작품을 알아봐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며 처음 제시한 금액의 반 값에 도마뱀 조각을 팔겠다고 했다.

아... 그런데 뭔가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 예술성이 어떻고 하던 내 마음은 반으로 훅 떨어진 가격이 잘만하면 그 반으로도 떨어질 것 같은 간사한 기대감으로 바뀌어있었다.


" 쓰리 유로!"

"노노, 플리즈"

"오케이. 포 유로"


몇 번의 가격 흥정이 오갔지만 결국 난 그의 도마뱀을 사지 못했다. 경찰의 포위망에 그가 들어왔고 어떻게든 잡히지 않으려는 그는 내 손에 들린 도마뱀을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듯 낚아채 가져갔기 때문에.


어쩌면 검은 얼굴에 커다란 흰자위를 굴리는 그는 솜씨는 좋지만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배고픈 예술인이었는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그가 배고픈 시절 만들었다는 사연 있는 그 작품이 훗날 수억 유로의 가치를 갖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거져로 먹으려 들었던 도마뱀 조각이 내 일생일대를 흔드는 끝내주는 기회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지금 기회를 놓쳐 버렸다는 것을. 또한 선택에 있어서는 망설임 따위 모기나 줘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여행 가서 겪은 사건이 뭐이 큰 대수라고 그 얘길 하고 있느냐 말할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잠든 스페인의 마지막 밤. 굳이 이런 이야기들을 꺼내는 이유는 지난 이틀간 내리 일어난 일말의 사건들이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다.


스페인이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뭘까? 아니, 인생이 내게 하려고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을 거듭한 후에야 드디어. 혼자 떠나려던 계획을 포기하게 된 이유가, 뜻대로 되지 않아 불편한 여행길을 감내했던 이유가 퍼즐 조각 맞춰지듯 시원히 들어맞았다.


만약 가족들이 내 발목을 잡지 않아 끝까지 혼자만의 여행을 고집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때 굳이 내 방을 청소하러 들어온 아빠가 집구석 탈출 계획이 적힌 다이어리를 보지 못했더라면, 엄마의 탈출 계획을 쿨하게 받아들인 딸내미가 잘 다녀오라 손을 흔들어 줬더라면.

나는 과연 이번 버스 테러 사건을 피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이미 가본 구엘공원을 다시 가보기나 했었을까?


그때의 내 인생은 미리 알고 있었던 거다. 인생의 찬란한 순간은 혼자가 아닌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것을. 그런 기회는 결코 흔치 않다는 것을. 그리고 때때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함으로써 거친 운명의 파도도 지혜롭게 피해 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억지 일지도 모른다. 어쩌다 보니 잘도 들어맞는 우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날 잡고 늘어진 세 노약자분들 덕분에 난 늦지 않게 부모님과 아이와 함께 내 인생의 끝내주는 타이밍을 즐길 수 있게 됐다는 거다. 어떻게 알았겠는가. 어제의 내가 아이의 울음 덕분에 버스 테러도 피할 수 있을 줄은, 식구들 덕분에 다시 가본 구엘 공원에서 기념품상 그를 만나 선택에 있어서는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될 줄은.

그러니 억지라고 해도 맞다고 우겨야 하는 게 옳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그 시간, 그때, 찰떡 같이 내 앞에 나타나 나의 탈 집구석 계획을 망쳐준 세 노약자 분들이 고맙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인생의 빛나는 부분을 함께 나눌 기회를 주어 고맙다.

다음 기회는 없는 게 인생의 타이밍이라고 하니 남은 여행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다.

인생은 타이밍, 망설이면 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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