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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끼리 Jan 21. 2021

감사노트 작성 후기

벌써 4년 나도 뭔가 꾸준히 하고 있군.

내가 감사노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교 교양수업에서였다.

국어와 작문 수업에서 감사노트가 웬 말이냐? 강의계획서에 나오는 논문 작성 및 글쓰기와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과제였다. 뭐 감사한 일이 있다고 하루에 3개씩이나 적으라는 말인가?.. 눈 앞이 캄캄했다. 그냥 다른 과제들처럼 한 번에 몰아서 하기 힘들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이 들었다.


간단하지만 어마 무시한 과제, 하루에 3개씩 감사한 일을 적어보기... 막막했다. 하지만 그냥 사소한 것을 쓰면 된다고 하셨기에 나는 그냥 / 기숙사 밥이 정말 맛있었다 / 친구랑 먹은 브리또가 정말 맛있었다 / / 등등

내가 좋아하는 먹는 것 위주로 적어나갔다. 그렇게 1주, 2주가 지나니까 너무 똑같은 내용만 쓰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아무렴 이것도 과제인데 나에게 먹는 것이 한 달 내내 감사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교수님이 보시기에 성의 없어 보일 것 같다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정말 머리를 쥐어짜 내며 한 학기 동안 신박한(?) 감사한 일들을 생각해냈다. 며칠 씩 밀려서 쓰기도 하고 거짓으로 쓰기도 했던 나의 첫 번째 감사노트.   


드디어 감사노트 제출 과제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의무감에 작성했던 감사노트를 쓰지 않으니 뭔가가 허전했다. 약간은 그립기도 했지만 굳이 찾아서 쓸 만큼의 열정은 없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다음 학기 교양으로 청년기의 심리라는 수업을 들었는데 그곳에서도 감사노트를 쓰는 과제가 주어졌다.


운명의 장난인가? 감사노트를 과제로 하는 수업을 2개나 듣다니... 이번에는 하루 5개씩 감사한 일들을 적어야 했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이번 과제는 파일로 압축해서 메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처음보다 훨씬 수월하게 감사노트를 적을 수 있었다. 가을 단풍이 든 캠퍼스를 보면서, 생일을 축하해주는 친구들과 함께하며,  재미있는 소설책을 읽으면서 감사노트가 떠올랐다. 오늘은 이러이러한 일들을 적어봐야지 하루를 보내며 수시로 떠올렸다. 하루 5개씩 감사한 일을 채우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규칙적으로 적어놓아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노트나 메모하지 않으면 생각은 스처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핸드폰 알람을 맞춰놓고 즉시 메모를 하는 습관을 들였다. 오후 8시, 저녁 먹고 씻고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내가 어디에 있든 간에 알람이 울리면 짧게나마 핸드폰에 감사한 것을 적어놨다. 00월 00일 - 아침 엄마의 계란 비빔밥/ 친구가 빌려준 책/ 집중이 잘 된 시간/ 맑은 하늘과 공기// 등등 생각하는 것과 적는 습관을 길러준, 그러나 여전히 약간의 의무감이 존재한 나의 두 번째 감사노트.


과제가 끝나고도 일주일에 3~4번 정도 핸드폰을 켜고 생각나는 데로 고마운 일들을 써 내려갔다. 과제의 해방감을 느끼고자 정말 대충 적었는데 폰을 바꾸면서 용량이 너무 많이 차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깝긴 했지만 앱을 사용하는 게 우선이었기에 나는 감사노트를 지우기로 결정했다. 자발적으로 대충 작성한, 지금은 사라진 메모장 속 나의 세 번째 감사노트.



그리고 손바닥만 한 노트를 사 왔다. 반강제적이었지만 감사노트를 쓰며 긍정적인 영향을 나도 느꼈기 때문에 꾸준히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다이어리와 함께 감사노트 적는 것은 나의 작은 습관이 되었다. 이번 노트는 아무에게도 보여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조금 더 자유롭게 감사한 일들에 대해 적을 수 있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솔직해지니 감사한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되려 노트를 쓰는 시간이 기다려지면서 즐거운 시간이 된 감사노트 적기. 과제로 제출할 때보다 훨씬 다양한 것들로 채워지는 걸 보니 신기했다.

오글거리는 영화 대사, 노래 가사 / 혼자서 설렜던 동기 오빠의 한 마디 / 남들 앞에서 거짓으로 공감하며 싫다고 했던 우중충한 날씨(그날 유독 먹구름이 멋있었다)/  방금 싼 강아지 똥을 비닐로 감싸 조물딱 거리는 느낌 / 얄미운 친

구의 실수/ 기다리지 않고 한 번에 켜진 횡단보도 / 등등. 나에게 적합한 방법을 찾아서 나에게 솔직할 수 있었던 네 번째 감사노트.


네 번째 감사노트가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루가 힘들고 짜증 날 때에도 노트를 적다 보면 고마운 일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면 나를 둘러싼 특별하고 재미난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하루를 더 즐겁고 활기차게 보낼 수 있게 도와주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감사노트, 나에게 이 노트를 쓰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생각을 바꾸니 음식 하나 강아지와 보내는 짧은 시간 하나가 감사하다.
Christmas love by bts 지민 - 생각 못한 크리스마스 노래 선물에 무척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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