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가게가 있다. 나만 알고 싶은데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줬으면 하는 가게. 들렀을 때 내가 늘 가는 자리가 비어 있고, 늘 그랬듯 한적했음 좋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됐으면 하는 가게. 오늘은 이런 가게에 대해 써 보려고 한다. 북적이는 인파가 어울리는 공간이 있고, 한적함이 매력인 공간이 있다. 밴드 공연장은 아무래도 전자가 어울리겠고, 내가 좋아하는 가게들은 대부분 후자가 어울린다.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싶을 때 가는 술집이 있고, 친구랑 오랜만에 밤새 수다 떨 목적으로 가는 조용한 술집이 있다. 서점도 그렇다. 책보다 사람 구경이 더 하고 싶을 땐 커다란 대형서점에 간다. 그러지 않고 책과 책방이 보고 싶을 땐 작은 서점에 간다. 작고 조용한 가게들의 한적함과 고즈넉함을 사랑한다. 그런데 이 마음은 자꾸 심술을 낸다. 나만 아는 줄 알았던 맛집이 어느 날부터 줄이 늘어설 때, 오랜만에 들른 술집에 사람이 가득 차 있어 문 앞에서 발길을 돌릴 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서점이 낯설 때. 이럴 때면 마음 한 편에 자꾸 심술이 싹 튼다. 왜,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대체. 사랑하는 단골 가게가 잘 돼서 지점을 확장하고, 이전하고 하는 일들은 분명히 호재일텐데 왜 나는 거기에 아주 축하할 수 없을까. 왜 자꾸 잔존을 바랄까. 아무래도 이 세상이 나를 주연으로 한 드라마가 아니라 그런 게 아닐까. 극적 연출이 없는 현실에는 내 동선에 딱 맞춰 내 앞에 도착하는 택시도 없고, 어제 떠난 애인이 2분만에 돌아오는 시간 전환도 없다. 그러니까 PPL도 아닌 가게가 내 동선에 영원히 머물러 줄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그 공간에서의 경험은 공간에 드나들 수 있는 모두가 가지는 공유감인데, 이걸 소유감으로 자꾸 착각하게 돼 그런 걸까. 좋아하는 가수가 잘 됐으면 좋겠지만, 콘서트 티켓팅이 어려워지는 건 싫은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심술일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마음은 가끔 그런 심술을 내곤 한다. 이런 걸 보면 좋아한다의 반대말이 싫어한다가 아닌 게 와닿는다. 좋아해서 싫고, 싫어서 좋은, 그런 얄궂은 양자적 마음이 이런 마음에도 깃든다. 바다도 비슷하다. 가까이서 파도를 보자면, 문득 저 물비늘이 나에게 까지 뻗쳤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돼면 양말이 젖기 싫어 소스라치며 달아난다. 예쁘고, 또 닿고도 싶지만 그렇다고 진짜 닿으라는 얘기는 아니었어. 이런 앞뒤 안 맞는 말을 궁시렁거린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 마음이 조금 더 나쁘게 기울어지면 선을 넘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만약 내가 아름답고 예쁜 바다에 서 있고, 도처에 썩어 가는 바다가 있다고 하자. 그럼 나는 당장의 바다가 아름다우니 그저 지금을 향유할까, 아니면 저편의 바다를 위한 실천을 조금씩 해 나갈까. 교과서적으로 후자가 아주 옳지만, 별로 쉬운 방법은 아니다. 바닷가에 놀러 가 실컷 그 아름다움을 빌려 놀고나서 쓰레기를 남기고 오지 않았다고 장담할 사람이 있을까. 예전에 학생회 일을 하며 여러 축제를 운영하고 또 정리한 적이 있다. 하루는 저녁 놀을 배경으로 딱 한나절, 영화 상영을 한 적이 있다. 그 행사가 끝난 뒤, 잔디밭과 계단은 팝콘과 과자와 쏟은 음료수로 뒤범벅 돼 있었다. 그런 행사의 뒷정리에서 분리수거는 정말 사치라, 모든 쓰레기가 뭉뚱그려져 일반쓰레기 봉투로 들어간다. 그 한나절 동안의 쓰레기가 수십개 봉투를 가득 채웠다. 바다와 공원의 아름다움엔 의무가 따른다. 그런데 그런 의무는 당장 지키지 않아도 별로 티가 나질 않는다. 이 익명성이 커지고 커져 의무를 저버리는 다수가 됐다. 그렇게 바다를 보고 있자니, 먹고 있던 에이드가 담긴 플라스틱 컵이 부끄러워졌다. 결국 나도 저편의 썩은 해변을 염려치 않고 아름다운 공간만 골라 다니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남들이 밟아 더러워진 눈을 옆으로 치우기 보단, 아무도 밟지 않아 새하얀 눈에 발길이 갔다. 나는 그렇게 오늘도 사소하게 이기적이었고, 사랑을 감당하고자 텀블러 휴대를 결심한다. 제주도의 새별오름엔 수많은 익명의 범람 앞에 당당히 '쓰요(쓰레기 요정의 준말)'를 기명하고 쓰레기를 주으러 다니는 사람이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런 걸 몇 년 씩 오름을 청소하고 있다. 사랑을 많이 받는 제주는, 그만큼 감당할 쓰레기가 많다. 이게 도대체 왜 성립되는 문장인 지 어이가 없지만, 현실이 그렇다. 예쁘면 사람들이 몰리고 사람들이 몰리면 쓰레기가 생긴다. 중간을 괄호 쳐버리면 예쁘면 쓰레기가 생긴다는 꼴이 된다. 그런 문장은 한명이서 고쳐 쓸 수 없다. 한명이 시작하고 다른 이들이 그를 보고 따라야 한다. 그러니까, 선한 영향력이 필요하다. 서점에서 어쩌다 발견한 책에 담긴 쓰요의 이야기처럼 어쩌면 선함은 도처에 있을 지 모른다. 그러니 도처의 선함에 영향 받을 만반의 준비를 하자. 그렇게, 사랑에 따른 감당을 하자. / 저라는 부족한 사람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걸 쓰레기를 주우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삶도 어떤 누누군가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런 당신의 삶이 나로서 온전하길 응원합니다. /새별일기-자발적 쓰요의 새별오름 청소 일기, 이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