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기 캘리포니아 남부 쪽에서 남은 시간은 별로 없잖아. 뭐 특별히 하고 싶은 거 없어?”
리암은 침대에 걸터앉아 바닥에 떨어진 잠옷을 주워 입으며 물었다.
“하고 싶은 거… 있지.”
나는 괜히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리암의 티셔츠 밑으로 손을 넣었다. 리암은 하하 웃으며 작게 소리쳤다.
“변태다!”
“헤헤. 근데 나 진짜 하고 싶은 거 있기는 해.”
“뭔데?”
“너, 혹등고래 본 적 있어?”
리암은 고개를 저었다. 캘리포니아의 남쪽 바다는 온갖 고래들의 서식지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 바로 그 혹등고래.
“여기서 20분 정도만 가면 나오는 항구에서, 고래 탐사 보트를 탈 수 있어. 사실 두 번 가봤는데, 한 번은 혼자 가서 아무것도 못 보고, 한 번은 메이랑 가서 돌고래들 봤어. 돌고래들도 좋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건 큰 고래야. 혹등고래가 점프하는 걸 봐보고 싶어. 이것도 내 버킷 리스트 중에 하나야. 근데, 나 이런 거에서 운이 진짜 없어.”
“가자. 너무 재밌겠다!”
리암은 환하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게다가, 난 운 되게 좋아.”
“오 진짜?”
“그럼. 그 지옥 같은 틴더 판에서 지원, 너를 찾았잖아. 넌 나의 행운이야. 네잎클로버.”
“리암… 그럼 나도, 운 되게 좋은 편이라고 해야겠다.”
“운 좋은 사람 둘이 가니까, 혹등고래도 볼 수 있을 거야!”
“좋아. 내일 바로 배 타러 가자. 지금 예약해 버릴게.”
*
휴일의 바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바다 앞에는 커다란 갑판과 몇 개의 식당, 알록달록하고 작은 놀이기구들이 있었다.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활기찬 날이었다. 우리는 바다 옆으로 난 산책로를 걸었다.
“지원은 바다 좋아해?”
“응. 좋아해. 나, 제주도라는 섬에서 컸다고 했잖아. 그래서 웬만한 바다에는 큰 감흥이 없어. 여기만 봐도, 제주도 해변들이 훨씬 멋지거든. 그래서 나는 내가 바다를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어. 근데 아니더라. 바다를 보면 그냥 편해져. 그래서 좋아.”
“제주도 바다가 그렇게 멋져?”
“응. 여기보다 훨씬… 맑고, 밝아.”
“보고 싶다. 너를 키운 바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갑판 위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다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앉아 낚시를 하고 있었다. 한참 그들을 바라보던 리암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낚시'로 죽는 물고기는 진짜 운이 없는 거 같아.”
“하하. 대체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거야?”
“그렇잖아! 세상에 물고기 엄청 많을 텐데! 아마 몇억분의 일 확률일 거야. 뭔 고기잡이 배도 아니고, 저렇게 한 사람의 낚싯바늘에 걸려서 죽는 건.”
리암은 웃으며 열변을 토했다.
“나 네 뇌가 정말 좋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던 최대의 고백이었다. 리암은 ‘세상에 물고기가 몇 마리나 있나요’를 검색한 결과를 내게 보이며 씩 웃었다.
“몇억분의 일도 아니야. 지원, 놀라지 마!. 물고기, 3조 5천억 마리가 있대.”
햇빛 아래에서 반짝거리는 너의 갈색 머리카락을 만지며 생각했다. 세상에 그렇게나 많은 물고기가 있다는데, 하필 내 눈앞에서 입에 바늘이 걸릴 물고기에 대해. 그 엄청난 확률을 뚫고도 누군가를 찾아가는, 기가 막히게 희귀한 불운에 대해. 물속을 헤엄치는 생명체들의 무한 같은 개수와, 그 물 위에 서 있는 우리에 대해.
리암, 너는 유독 운이 없던 물고기였을까.
오늘도 족히 70억 명은 하품하는 세상에서, 하필 떠날 내 손을 잡은 네가... 네가 아니라 물고기였다면. 저기 바닷가 고양이의 먹잇감이나,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 인간들의 환호를 위해 세상 밖에 끌어올려졌다가 입이 찢겨 버려지는 장난감으로. 행운보다 보기 드문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있을까.
하필 나로 인해 아프기로 한 네가, 땅이 아니라 바다에서 태어났다면.
“이제 배 시간 거의 다 됐어. 일어나자!”
무섭지 않은 것과 미안한 건 아주 다른 감정이었다.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고 확신했지만, 미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떠나면 너는 많이 많이 울겠지. 물론 언젠가는 나도 울겠지만…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리암 앞에서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
배는 무섭도록 빠르게 항구에서 멀어졌다. 어림잡아 서른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배에 올라탄 것 같았다. 우리는 갑판 뒤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바다를 바라봤다. 갑판에는 우리 말고 한 가족이 더 있었다. 아빠와 삼 남매인 것 같았다.
“지원, 너는 신을 믿어?”
리암은 한참을 바다를 바라보다 물었다. 드넓은 자연 앞에서는 이런 질문이 아무렇지 않게 나왔다.
“아니. 안 믿어.”
“운명은?”
“믿어.”
리암은 신기하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신은 안 믿는데, 운명은 믿어?”
“응. 운명은 믿어. 근데 사실, 우연을 안 믿는 거야 나는.”
“우연을 안 믿는다니!”
“하하. 뭔 미치광이처럼 들린다는 거 알아. 더 정확히 말하자면…나는 결정론자거든.”
“뭔지 잘 몰라. 설명해 줘.”
“음, 그러니까. 결정론은… 우리 행위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들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거야. 사실 운명론이랑 결정론은 완전 달라. 그리고 배운 지 오래돼서 제대로 못 설명해. 나중에 구글링해.”
“그럼, 지원한텐 어떤 게 운명이야?”
나는 리암에서 바다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모든 거.”
배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
“너는? 신을 믿어? 운명은?”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리암의 어깨에 기대며 물었다.
“신은, 가끔. 운명은 항상.”
“가끔 믿는 신은 어떤 거야?”
“음, 작년이었나, 기말고사를 끝내고 진짜 엄청 피곤했던 적이 있어. 그래서 기숙사에 들어와서 바로 침대에 누웠지. 근데 갑자기 밖에서 다람쥐가 엄청 시끄럽게 우는 거야. 그러더니 창문을 막 두드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그래서 침대에서 일어나서 창문으로 갔더니, 걔가 나를 완전 노려봤어. 웃기기도 해서, 뭘까 하고 걔를 빤히 들여다보려는데 갑자기 쿵! 침대 머리맡으로 실링팬이 떨어지면서 날아갔어. 아마 그 자리에 계속 누워있었으면 나 죽었을지도 몰라.”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이 얘기를 왜 했냐면, 나한텐 그 다람쥐가 신이었어. 그렇게 내게 찾아와서 나를 도와주고 가버리는 존재들, 그게 나한텐 신이야. 근데 딱 그러고 며칠만, 아, 감사합니다. 하고는 뭐. 또 잊고 지내게 돼. 그래서 신은 가끔 믿어.”
어느새 우리 옆에 앉아있던 삼 남매까지 리암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가장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었다. 아이도 나를 보며 웃었다. 다섯 살쯤 됐을까.
“헤… 나 화장실 다녀올게.”
리암은 아이들이 쳐다보는 것도 모른 채 화장실로 향했다.
삼 남매는 혼자된 나를 빤히 바라봤다. 머지않아 나와 눈을 마주쳤던 꼬마 아이가 내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다람쥐가 신이에요?”
“음, 적어도 걔한테는?”
“나는 로라에요.”
“안녕 로라. 나는 지원이야.”
“다람쥐 오빠는 남자 친구예요?”
“하하. 아니, 아니야.”
나는 리암이 그새 돌아왔을까 순간 주위를 살폈다.
“근데 왜 그렇게 꼭 붙어 있어요? 나도 유치원에 남자 친구 있는데, 나는 걔랑만 손 잡아요. 남자 친구 아니면 손 안 잡아요.”
“와, 로라는 좋겠다. 잘했어. 앞으로도 그렇게 해. 로라가 잘 하고 있는 거야. 나 같은 어른들은…솔직히 좀 구려.”
“이건 비밀인데, 남자들이 원래 좀 별로래요.”
“하하하.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언니가요. 우리 언니, 이번에 중학교 갔거든요. 근데 거기 남자애들은 다 바보래요.”
“로라 언니 완전 똑똑하네.”
로라는 그건 아닌 것 같은 데라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 질문을 이어 나갔다.
“고래 본 적 있어요?”
“아직 없어. 근데 엄청 엄청 보고 싶어. 고래 보는 게 소원이야.”
“엄청 보고 싶어요?”
“응, 엄청.”
“그럼, 다람쥐 오빠가 보고 싶어요, 고래가 보고 싶어요?”
“음…”
로라의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내가 조금은 우스워질 때쯤 로라의 언니가 다가와 젤리를 먹자며 로라를 데려갔다. 로라는 “이따가 꼭 말해줘요!” 하며 새끼손가락 약속을 하고 갔다. 그동안 배는 계속 고래를 찾아 바다를 돌고 있었다. 이제 삼십 분 후면 다시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전에 고래를 볼 수 있을까?
생각하던 때 리암이 돌아왔다. 나는 로라와의 대화를 전하지 않았다. 리암은 돌아오자마자 내게 팔짱을 끼며 내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지원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하면서.
우리는 멍하니, 고래가 보이지 않는 바다의 윤슬을 바라봤다.
"리암. 빛에 반짝이는 잔물결을, 한국말로는 윤슬이라고 해. 따라 해 봐, y-o-o-n, s-e-u-l."
“유,은,슬.”
“하하. 어설프기는 한데 잘했어.”
그리고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윤슬에 대응하는 영어 단어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덜컥 숨이 막혔다. 너에게 안겨주고 싶은 수많은 말들이 이렇게 흐릿해지겠구나. 내가 쌓아온 이 구질구질한 언어들이 너에게는 꽤 쿨하게 들릴지도 모르겠구나.
그 침묵 속에서 리암은 내 손을 고쳐 잡았다. 우리가 고래를 보러 왔다는 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듯, 리암은 흔들리지 않고 나만을 바라본다. 에메랄드 같은 네 눈동자에 내 진갈색 눈동자가 비쳐 보인다. 내가 너를 보지 않을 때에도 너는 나를 보고 있다.
그 순간 로라가 기다리던 답을 알았다.
“다람쥐 오빠가 보고 싶어. 고래보다 훨씬 더. 고래를 못 본 건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늘 행운이 멀리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얘가 나를 꽉 붙잡고 있잖아.”
“응?”
리암은 내 말이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내 눈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잘 생겼다. 일기장에서도 욕심낼 수 없었던 사랑.
“리암.”
나는 씩 웃으며 리암의 볼에 손을 올렸다.
“우리…”
마침내 그 말을 하려는데 리암이 검지 손가락으로 내 입을 막았다.
“잠깐만. 내가, 내가 말하게 해줘.”
리암이 내 말을 끊은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본 리암은 다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눈을 맞췄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세상에 등장한, 내 세상을 멈추는 말.
“지원, 우리 연애하자.”
네가 노래가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안녕을 평생을 염두에 두고 할 날을. 시작부터 나는 이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우연을 믿지 않는다는 신념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나는 늘 너와의 끝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우연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사랑은 운명일 테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적이었다. 네가 내 기적이었다. 행운이 아니라 기적.
그러니까… 네가 그 화가 날 정도로 운이 없는 물고기였다 해도. 웃으면서 답할 수 있다. 이젠 정말로 무섭지 않으니까.
“응. 좋아.”
멀리 로라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와 함께 리암을 껴안으며 깨닫는다. 아, 저 아이가 신이구나. 이제 하필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