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 나랑 같이 뉴욕 갈래?”
여행의 끝을 하루 남겨두고 리암이 물었다.
“...어?”
“나, 너 공항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안 가고, 뉴욕으로 가보려고.”
리암은 강한 결의에 차 있었다.
“용감한 지원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나 지금, 태어난 이후로 집에서 가장 멀리 와있어. 그리고 이렇게 멀리 오니까, 비로소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 나랑 같이 뉴욕으로 가자. 비행기 표 수수료 이런 거 걱정하지 마. 다 내가 내줄게. 그니까… 한국 가지 마. 나랑 더 여행 하자. 이렇게 끝내기 싫어.”
모든 게 너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져,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리암의 고백은 그 정도로 강렬했다.
그리고, 네가 내가 있을 곳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미치광이 같은 고백을 바로 며칠 전에 했다. 그렇다면 어디든 너를 따라갈 수 있어야 할 텐데. 분명 내 모든 마음은 진심이었는데. 그래, 같이 가자라는 말이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리암.”
“응?”
“여행은… 끝내야 여행이야. 그리고 나는… 여행으로 도망쳐야 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아.”
이번만큼은 리암의 우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울지 마. 슬픈 일 아니야.”
그러자 리암은 천천히, 그렇지만 또박또박 물었다. 울음을 삼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같이 안 간다는 거지?”
나는 어느 때보다 안정된 목소리로 답했다.
“응.”
“...나는 지원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줄 알았어.”
“싫어. 리암, 진짜 싫어. 단순히 한국이 싫은 게 아니라, 다시 돌아가서 마주해야 하는 내 진짜 삶이 싫어.”
“그렇게 싫은데도, 꼭 돌아가야 해?”
“리암.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곧 도망치는 거고, 세상의 압력에 지는 거라고 생각했어. 세상이 늘 겁 줬거든. 동양인 여자가 어떻게 한국 밖에서 살래,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면서, 공대도 아니면서, 집이 그렇게 잘 사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한국 밖에서 산다는 소리를 해, 하면서. 그래서… 오기로 가득해서, 용감해지려면, 겁쟁이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든 여기에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내가 싫어하는 것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게 진짜 용기라고 믿었어. 나는 지는 게 정말 싫거든.”
다시 리암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게다가… 너 때문에. 정말이지 너 하나 때문에. 아무 연고 없는 이 땅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어. 너는 내게 그만큼 특별했으니까. 네가 내 집 같았으니까. 더더욱, 떠나기가 싫었어. 머물 수 있을 만큼 오래 머물고 싶었어.”
리암은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더 있을 수 있는데도… 돌아가려고 해?”
나는 리암의 코끝에 검지 손가락을 올렸다. 그리고 리암의 코끝을 꾹, 눌러봤다. 세상 누구보다 나를 황홀하게 하는 너. 네가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 지 너는 정말 알까. 그런데도 가야만 해. 너를 떠나야만 해. 왜냐면...
“돌아가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도망치고 싶은지 알 수 없어. 그리고 네가 내가 있을 곳 아닐까 생각하던 순간 깨달았어. 돌아간다고 지는 게 아니야. 돌아가면서도, 아니 심지어 도망치면서도… 이길 수 있어. 왜냐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지켜내야만 하는 곳은… 한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나. 나 하나니까.”
리암은 나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지원은 예쁘고, 귀엽고, 똑똑하고, 착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말 강해. 그런 너를 사랑해. 너는 강하니까, 약해지는 날이 와도 혼자 숨어버리지 않을 걸 알아. 손 잡고 다시 일어날 거라는 걸 알아. 나는 그런 너를 닮고 싶어. 너처럼 되고 싶어서, 네 옆에 있고 싶어. 네가 어딜 가든 널 사랑하고 싶어.”
리암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답했다.
“나도, 나도 그래 리암. 우리가 서 있는 대륙이 달라지고, 눈 뜨는 시간이 달라진다고 해서 이 마음이 어디 가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난 가야만 해. 네가 마침내, 기타 치러 뉴욕에 가듯이.”
“...어떻게 알았어?”
“버스킹의 성지잖아.”
*
이코노미 창가 좌석에 쭈그려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이제 이 땅을 떠난다. 한국으로, 그토록 미워한 서울로 간다. 어쩐지 이번엔 그렇게 밉지 않을 것 같아.
이 대륙에 내가 자리 잡고 있던 날들이 거짓말 같이 느껴진다. 이 땅에서 내 침대라는 걸 가져봤고, 버스를 탔고, 수업을 들었고, 시를 썼고, 친구를 사귀었고, 웃고 울었고, 사랑을 했다니.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건 그만큼 간절했어서일까, 그만큼 행복했어서일까.
지금 시간은 밤 10시. 이륙과 함께 귀가 아파오지만 이어폰을 끼지 않기로 한다. 지긋지긋하기만 했던 비행기의 소리를 외워보려고 한다. 창문 아래로는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이 반짝거린다. 온갖 건물들의 창문들과, 자동차들의 라이트가 반짝거린다. 그리고 저 어딘가에 리암이 있다. 가본 적 없는 길을 가는 리암. 온전히 새로운 용기를 품고, 웃으며 핸들을 잡고 있을 리암. 나는 리암의 볼을 상상하며 괜히 창문을 만져본다. 차갑다. 손가락의 온도에 집중하며 생각한다.
너는 네가 이렇게 빛나고 있다는 걸 알까? 착륙하면 꼭 말해줘야지. 하늘에서도 네가 반짝이는 걸 볼 수 있었다고.
리암의 반응을 상상하다 픽, 웃음을 터트린다. 왜 나는 매번 이렇게 바보 같을까. 리암이라면 분명 이렇게 답 할 거다.
“땅에서도 네가 반짝이는 걸 볼 수 있었어. 너는 네가 그렇게 빛나고 있다는 걸 알았어?”
습관처럼 시를 쓰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나를 시인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그런 나를 진짜 시인인 네가 닮고 싶어 하다니. 사랑이란 대체 뭘까 생각한다.
비행기는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반짝임들에서 멀어지고, 어두운 밤하늘과 구름 사이로 들어온다. 이제 이어폰을 귀에 꼽고 신중하게 노래를 골라본다. 최근 재생된 곡은 또, 존 레논의 imagine. 그러고 보니 나는 온종일 무언가를 상상한다. 그러니 노래에서 만큼은 잠시 쉬어가기로.
좌석 벨트 표시등이 꺼졌다는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진다. 비행기의 좌석 벨트 정도야 하고 있어도 그렇게까지 불편하지 않다. 그치만 안 해도 된다니까 괜히 풀어본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시 창문 옆으로 머리를 기댄다. 비행기의 진동이 관자놀이를 타고 들어온다. 너도 떨고 있구나.
서울로 간다. 이번엔 그렇게 미워하지 않을 거야.
* 1년 후
인천 공항은 언제 와도 북적거린다. 사람들의 들떠있는 표정이 공기 중에도 떠다니는 것만 같다. 비행기에도, 공항에도 감흥이 없던 나는 늘 그런 사람들을 조금씩 재수 없어 하고, 또 부러워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오늘이 오기만을 매일 달력에 X자를 치며 기다렸다. 그러니까 오늘은, 리암이 한국으로 오는 날.
리암이 타고 오는 비행기의 착륙 시간은 오후 다섯 시. 입국 심사를 마치고 짐까지 찾고 나오다 보면 족히 여섯 시는 될 거라는 걸 아는데도, 나는 네시에 이미 공항에 도착해있다. 생각해 보니, 처음 리암을 만나던 날에도 그랬다. 여전히 나는 일찍 와서 너를 기다린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나는 그 시간을 사랑한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미워하지 않는다. 이 심장 박동은 좋은 거니까.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냈다. 어젯밤부터 열심히 꾸며온 페이지를 펼쳤다.
리암, 웰컴 투 코리아! -
공항으로 데리러 온 리암에게 종이 같은 거 들고 있으면 도망쳐버릴 거라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던 게 벌써 1년도 더 된 일이라니. 그다지 오래된 일 같지 않은데.
우리가 쌓아온 역사를 떠올렸다. 이제 우리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으니까 그렇게 했다. 정말 많은 걸 함께했는데, 어딜 떠올려도 네 얼굴만이 선명하다. 이제는 함께 돌아다니던 시간들 보다, 서로의 아침에 굿나잇 인사를 전하고, 시차에 맞춰 영상 통화를 하던 날들이 훨씬 길어졌다.
장거리 연애라니, 모두가 나서서 걱정해 줬지만, 어쩐지 우리에게는 하나도 어려울 게 없었다. 서로라는 확신이 있는 이상 그 무엇도 걸림돌이 될 수는 없었다.
나는 다짐했던 대로, 서울을 그렇게 미워하지 않았다. 대신 리암에게 보여줄 서울을 상상했다. 리암에게 보여줄 곳을 찾다 보니, 이 땅의 아름다움도 조금씩 인정하게 됐다.
분명 생각했었다. 진짜 강한 건, 누구의 손도 잡을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손잡을 상대를 내 힘으로 고를 수 있는 거라고. 그리고 나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내 손을 잡았다. 그래서 이제 정말, 누구의 손도 잡을 수 있게 됐다. 어디에서도 집을 찾을 수 있게 됐다.
멍하니 앉아있다 번뜩 정신을 차려 전광판을 확인해 보니, 리암이 탄 비행기의 상태가 착륙으로 바뀌어있다. 이제부터는 두 눈 똑바로 뜨고 게이트를 바라봐야 한다. 저기서 리암이 나올 거다. 세상에, 진짜로 리암이 온다.
우리를 us라고 해야 할지, we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울었던 밤이 있다. 내가 한글과 킬로미터를 쓰고, 네가 영어와 마일을 쓰는 한 우리 사이에는 영원히 뽑아낼 수 없는 작은 가시가 있을 거라 적었던 밤과는 또 다른 밤이었다.
평생 다른 단위로 세상을 계산해 온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의심하던 날. 고작 전화 한 번 받는 게 너무 어려워서 덜덜 떨던 날. 그리고, 그 모든 날들이 아득해진 오늘도 있다. 이제 더는 영어 사전을 뒤적이지 않는다. 같은 단어를 알아야만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라서.
그래서 나는 적어야만 했다. 특별할 것 없는 어떤 날, 나는 언어로 감히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떨어졌다고. 미움, 오만, 의심 같은 건 저 반대 편에 던져두고 왔다고. 그 세계에서 우리는 사랑한다. 언어를 초월한 마음을 나누는 세계.
마침내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너를 본다. 너는 24L짜리 캐리어에 너의 집을 담아왔다. 이곳에서도 우리의 다름은 여전하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하기로 한다. 아침이면 나는 국물을 찾고 너는 베이글을 찾을 세계에서, 밥심이라는 말을 평생 이해할 수 없을 너를 아무렇지 않게 사랑하기로 한다.
나는 스케치북도 내팽개치고 달려가 리암에게 안긴다. 너라서 두렵지 않아. 네가 있는 한, 너만 있다면. 이 지구 어디여도 좋아.
고개를 드니 리암은 이미 울고 있다.
“보고 싶었어. 리암,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
“늦어서 미안해.”
나는 다시 리암을 세게 껴안는다. 드디어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꽤 오래전부터 이렇게 엉엉 울고 싶었던 것 같다. 리암은 양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내며 묻는다.
“있어야 할 곳은 찾았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답한다.
“응, 찾았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다시 만난 오늘은, 우리의 겁쟁이 졸업식.